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

“나무는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에 잎을 피우며, 가을에 낙엽으로 떨어지고,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로 남는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봄날의 햇살, 여름의 질풍노도, 가을의 풍성함이 항상 자리 잡고 있다. 노인의 마음에 겨울은 없다.”

정말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만은 항상 청춘일까? 마음에서 세월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왠지 지는 해를 붙잡으려는 아련한 노년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마음은 이팔청춘이라더니, 꼭 내가 그래. 마음은 여전히 나이 안 먹는 거 같아.”라고 하는 노년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부정적인 감정 상태를 회피하고 행복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기를 바라기 때문일까.

“도리언, 내게는 자네가 알지 못하는 나만의 슬픔이 있네. 노년의 비극은 사람이 늙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겉은 늙었어도 마음은 여전히 젊다는 데 있지. 젊어서나 늙어서나 변치 않는 내 마음에 때로는 나 자신조차 놀란다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나이 많은 헨리경이 젊고 잘생긴 도리언에게 한 말이다. 자신은 이미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슬픔이 속마음에 숨어 있는 것을 느낀다. 몸 따라 마음도 같이 늙어 가면 사랑 같은 것은 생각나지도 않을 텐데, 주책없이 마음만은 젊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가슴앓이를 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까짓 것 가슴앓이 좀 하면 어떤가. 늙어가는 마음보다 젊고 활기찬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이 나이에 무슨 증후군’에 걸린 노년들이 이외로 많다. 그냥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진 노년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도,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새로운 사랑을 하는 것도, 새로운 옷을 장만하는 것도 주저한다.

이런 짓을 하면 왠지 ‘주책’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 겁을 낸다. 유독 나이에 주눅 들어 사는 문화 때문인가? 그렇다면 이런 문화는 빨리 바꾸어야 한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라는 노래도 있지 않는가. ‘이 나이에 무슨’보다는 ‘내 나이가 어때서’가 훨씬 좋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무표정해져 가는 노년들도 많다.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감정 표현이 없으면 소외감만 더해질 뿐이다. 나이 들어서도 적절하게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마음속으로만 “나는 돌덩이가 아니야!”라고 외쳐봐야 외로움만 더해진다.

반면에 “외로움은 참아도 그리운 건 못 참아!”라고 속마음을 죄다 드러내는 노년들도 있기는 하다. 지독한 사랑 병에 걸린 사람이다. 어쨌든 외로움도 그리움도 참고 살 것은 못된다. 지는 해는 그 안에 아직도 이글거리는 뜨거움이 가득 차 있다.

나이 들어가는 몸이 있듯이 나이 들어가는 마음도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게 변할까? 대개 몸 따라 마음도 쇠약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몸은 늙어가도 내면의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쇠약해지기도 하지만 더 강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새롭게 강해진다는 것은 ‘성숙’을 의미한다.

젊었을 때는 나이를 먹으면 욕심도 사라지고 품었던 미움도 다 가실 줄 안다. 후회도 안타까움도 두려움도 절망도 모두 아침 안개처럼 걷힐 줄 안다. 나이 든다는 것은 그만큼 ‘성숙’되는 것이기에 이만한 것쯤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나이가 들고 보면 그건 너무 큰 기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보통사람에게 이렇게 완전한 성숙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세월을 살아온 만큼 보이는 것이 넓어지고, 모르던 것도 더 알게 되고, 사리 판단을 더 잘 하게 된다. 그래서 욕심도 미움도 덜해지고, 사는 것 자체가 비교적 거침이 덜하면서 편하고 쉬워진다. 아마도 인간은 나이 들어가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성숙되어 가는 존재인가 보다.

세월이 주는 지혜와 경험과 연륜을 살리면서 젊고 멋있고 품위 있게 나이 들면 좋겠다. 나이 때문에 마음이 늙어야 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