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등록  청렴강사.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등록  청렴강사.

2009년 8월 28일에 안재성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당수이자 북한 외상을 한 『박헌영 평전(실천문학사)』을 발간했다. 

안재성은 『박헌영 평전』에서 박헌영(朴憲永 1900∼1956)과 호찌민(1890∼1969)이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을 책 앞부분에 수록하고, ‘1929년 모스크바 국제 레닌학교 재학 중,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김단야, 박헌영, 양명이 나란히 앉아 있다. 뒷줄 맨 왼쪽은 베트남의 호찌민,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주세죽이다’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다. (박헌영 평전, p 5) 

사진=김세곤 제공
사진=김세곤 제공

이어서 안재성은 『박헌영 평전』 p 146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박헌영 일가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은 1928년 11월 5일이었다. ...  11월 20일에 박헌영은 국제 레닌학교에 입학 신청을 하였다. 국제 레닌학교는 박헌영의 입학 신청에 어떤 이의도 달지 않고, 1929년 1월 18일 날짜로 입학을 허가 했다. ... 국제레닌학교는 일본어나 조선어는 시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헌영은 영어로 수업하는 반에 편성되었다. 영어 수업 외에 프랑스어 ·중국어 ·스페인어 ·헝가리어 ·아랍어 ·루마니아어 ·핀란드어 · 인도어 수업이 있어 학생들은 각자 익숙한 언어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학생 중에는 베트남 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호치민도 있었다. 한자 발음대로 호지명이라 불리던 그는 박헌영과 각별히 친해서 조선의 역사와 사상을 알게 되었다. 박헌영은 그에게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를 선물했다. 나라의 관리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인민을 대해야 하는가를 기록한 이 책은 장차 베트남의 지도자가 되는 호치민에게 평생의 지침이 되었다.28) 

 주세죽은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입학했다. 박헌영은 그녀에게 코레예바라는 가명을 지어주었다. 조선 여자라는 단순한 뜻이었다. ... 박헌영은 다른 여러 조선인 망명자들과 함께 1929년 2월자로 소련공산당에 입학했다. ” (박헌영 평전, p 140-146, 주요 연보 643 ) 

그리고 주 28)( 위 책, p 627)은 이렇다.

“박헌영이 준 『목민심서』는 베트남 하노이의 호치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박헌영은 이 책에 친한 벗이란 뜻의 붕우(朋友)라는 한자가 포함된 서명을 하여 선물했다고 한다.” 

그러면 박헌영이 호찌민에게 목민심서를 기증하였는지 여부를 검증하기 전에, 박헌영이 모스크바에 온 경위부터 살펴보자.

박헌영은 1900년에 충남 예산군에서 과부인 모친 이학규와 양반의 품위를 잃지 않은 부친 박현주 사이에서 혼외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첫 남편과는 딸 하나를 두고 사별하였다. 박헌영은 1915년 16세에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에 졸업했다. 그는 3.1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에는 일본 도쿄에 갔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하였다. 1921년(22세) 1월에 박헌영은 상해기독청년회 영어야학부에 입학하였고, 3월에는 고려공산청년당 상해회 결성에 참가하여 비서직을 수행했다. 5월에는 안병찬, 김만겸, 여운형, 조동호등이 주도하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주세죽(朱世竹, 1898~1953?)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여운형이 주례를 섰다.     

그런데 박헌영은 조선에 고려공산당 조직을 퍼뜨리기 위해 1922년 4월 김단야 등과 함께 비밀리에 입국하다가 신의주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5월 30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박헌영에게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하여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4년 1월 19일에 박헌영은 만기출옥하자 곧바로 서울로 갔다. 그는 3월에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에 재선임되었고, 4월에 동아일보에 입사하였다. 1925년(26세) 4월에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했고, 5월에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8월에 조선일보에 입사하였다.

그런데 10월15일에 조선총독부가 정간처분을 받은 조선일보에 대하여 정간 해제 조건으로 사회주의 기자들의 해직 처분을 요구하자, 조선일보는 박헌영 등 사회주의 기자들을 해직하였다. 게다가 11월 29일에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2월3일에 신의주 경찰소에 압송되어 22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예심을 받고, 1926년 7월 21일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7년 3월 조선공산당 사건은 예심종결되었는데, 박헌영은 9월13일 제1회 공판에서 법정투쟁을 하였다. 9월 20일에 박헌형은 제4차 공판에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고, 22일 제5차 공판 출정을 거부했고, 23일의 제6차 공판도 불참했으며 10월 7일에는 옥중 단식에 돌입했다. 이에 김병로와 한상억 변호사가 박헌영을 면담한 후 재판장에게 병보석을 신청하였는데 11일에 담당 검사가 보석 불가 의견을 제출하였다. 김병로 변호사등은 19일에 박헌영을 포함한 5명에 대하여 병보석을 신청하였으나 25일에 재판부는 일괄 기각하였다. 

하지만 변호사들은 11월 15일에 거듭 병보석을 신청하자 박헌영은 22일에 석방될 수 있었고, 서소문의 정신과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후 그는  5일 만에 퇴원하여 부인 주세죽이  혜화동에 마련해 둔 살림방으로 들어갔다. 이러자 박헌영 부부는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를 당하였다. 어디를 가도 노골적인 미행이 뒤따랐다. 박헌영 부부는 꼼짝도 못하고 한동안 집안에만 머물렀다. 혹시 누가 집에 찾아오면 박헌영은 발가벗고 혜화동 뒷산으로 달아나 미친 짓을 하고 괴성을 질러댔고, 주세죽이 추위에 떨며 산에 올라가 박헌영을 데려왔다. (박헌영평전, p 36-134, 641-6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