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이사장.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이사장.

하늘이, 구름이, 노을이 예쁜 날이다. 콧바람 투어나 해야겠다고 집을 나선다. 버스에서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해준다. “이놈 봐라, 내가 노인으로 보이나?” 언짢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만약 안 비켜주고 딴 짓하고 있으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이런 괘씸한 생각이 들 게 분명하다. 나이 들면 이렇게 몽니를 부리게 되는가보다.

나이대접!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어르신, 연세도 있으신데 …”라는 말을 들으면 듣는 어른 참 서운하다. 황혼도 서러운데 나이까지 들먹이니. 요즘 부쩍 “내 나이 황혼이지만, 연세가 아니고 나이야!”라고 젊게 봐달라는 노년들이 많아졌다. ‘나이는 못 속이지’ 보다는 ‘아직도 청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도 하다.

미국 미네소타주 의학협회에서는 ‘호기심도 이상도 없이 매사에 무관심으로 영혼이 주름진 사람’을 노인이라고 정의했다. 스스로가 늙었다고 생각하고,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하고, “이 나이에 그깟 일은 뭐하려고”라고 말한다면 그냥 노인이다. 그러나 “젊지는 않지만 늙은 것도 아니다. 인생에 배움은 끝이 없어. 아직도 해보고 싶은 재미난 일이 너무나 많아.”라고 말한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노인이 아니다. 

젊을 때는 철학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되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철학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되오.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는 데는 너무 이른 때도 너무 늦은 때도 없는 것이오.”

철학하는 데는 늙었다는 것이 아무 상관없다는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말이다. 오히려 여유로운 노년은 생각하기 좋은 시기가 아닌가.

햇볕 화사한 날에는 경치 좋은 곳에 여행을 가고,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날에는 책 한권 펴고 빗소리를 들으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정원의 꽃을 가꾸고 손자들과 놀기도 한다. 가끔은 가족과 함께 영화나 연극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린다. 날씨가 맑으면 맑아서 좋고,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개구리가 울면 개구리가 울어서 좋지 않은가.

노년에는 젊었을 때보다 푸른 하늘이 더 잘 보인다. 분주하게 사는 것만이 해답은 아니다. 머리는 비울수록 똑똑해지고 생각은 버릴수록 채워진다고 했다. 비우고 버리는 삶도 괜찮을 것 같다. 노년에는 현직의 많은 걱정거리를 내려놓을 수 있어서 마음이 한결 가볍다. 그래도 걱정거리가 있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중남미의 과테말라 고산지대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 사이에는 ‘걱정 인형’이라는 것이 전해 내려온다. 어떤 문제나 고민이 있으면 잠들기 전에 인형에게 말한 뒤 베개 밑에 넣고 자는데, 잠든 사이 인형이 주인의 걱정거리를 멀리 내다버린다고 믿는 것이다. 쓸 데 없는 걱정을 지워버리려는 인디언들의 지혜다. 이제 노년의 걱정거리를 모두 이 ‘걱정 인형’에게 말하여 멀리멀리 내다 버리자. 

노인의 말을 들어보라! 그가 살아온 과거를 말한다.
젊은이의 말을 들어보라! 장래의 일을 말한다.

청춘에 힘을 실어주는 그럴듯한 시 구절이다. 그런데 젊었더라도 추억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늙었더라도 미래의 희망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살아온 기간이나 남은 인생의 길이에 따라서 획일적으로 단정할 것은 아니다. 인생이 남은 세월이나 이두박근의 힘만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온화한 노년의 얼굴에 살아온 햇수만큼이나 지혜가 또렷이 쓰여 있다면 진정으로 존경받을 만한 노년이다. 여생을 ‘그냥 남아 있는 날’이 아니라 ‘새롭게 열리는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이는 그냥 숫자일 뿐이다. 행복한 삶을 원하는 사람에게 황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젊음은 젊음대로, 늙음은 늙음대로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학은 오리 다리가 짧다며 늘리겠다고 덤비고, 오리는 학의 다리가 길다며 자르겠다고 덤벼서는 안 된다. 다른 것은 그저 다를 뿐이다.

노년은 노년일 뿐,
괄시 받을 일도 대접 받을 일도 아니다.
도움 받을 일 있으면 도움 받고,
도움 줄 일 있으면 도움 주면 된다.
어눌한 만큼 현명하다.
그냥 그대로 노년으로 살면 된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저마다 자기의 삶을 살 뿐,
모두가 제 몫의 인생을 사는 주인공이다.
지금 행복해지고 싶으면 나이를 잊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