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이사장.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이사장.

“당신도 노년의 문지방에 들어섰군요.”
“나는 아냐! 아직 한창인데 …”
“그래도 소용없어요. 사회가 당신을 노인으로 판정해 버렸잖아요.”

곧 대중교통의 경로석이 사라질 것이다. 죄다 노인인데 누구를 위해 특별석을 마련할까. 노인들이 집단의 기억이자 그 기억을 계승하는 지속성의 상징으로서 특권을 누렸던 시대는 지나갔다. 노인의 사회적 역할은 줄어들고 관심대상에서도 노인이 멀어지고 있다. 이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국가는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몇 가지 방책과 보장으로 ‘노인 떼어놓기’를 하고 있다. 계속 일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이를 이유로 일자리에서 밀어낸다. 일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무지 애를 써보지만 헛일이다. 사회와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준비했고, 재미있는 일거리라도 마련해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은퇴가 없던 옛날은 분명히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오래 살게 되어 돈이 다 떨어진다면
연금이 거들 나서 안 나오기라도 한다면
치매 같은 몹쓸 병에 걸려 오래 살게 된다면
자식들도 나이 든 나를 찾아보지 않는다면

옅은 잠결에 문득 생각난 걱정 때문에 잠을 깬 후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허사다. ‘그럴 리가?’라고 부정해 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이 시대의 노년, 그들은 굶주림이 한이었던 시절을 살아왔다. ‘못 먹어서 누렇게 뜬 얼굴을 그만 보고 싶다’는 처절함에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고 부르짖으며 모질게 살아 왔다. 하루 밥 세끼 잘 못 먹는데, 행복 같은 것은 물론 사치였다. 소득 3만 불 시대, 이제 그 지긋지긋한 빈곤에서 벗어났다. 그들의 노력이 결과를 낸 것이다. 그저 배불리 먹고 등 따뜻하게 누울 수 있기를 바랐는데, 이게 뭔가? 나라는 분명히 먹고 살만해졌지만 그들은 다시 내몰리고 있다.

하루하루 사느라 노후 준비는 제대로 못했다. 이제 좀 편히 쉴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럴 여유가 없다.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어 쉬는 모양이 휴식(休)이란다. 그런데 기대어 쉴 나무가 없다. 슬퍼서 우울해지고, 걱정 때문에 불안해지고, 분노로 적개심이 생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시 ‘마음 다스리기’와 ‘몸만들기’를 해야 한다.

에스키모들은 슬픔, 걱정, 분노가 밀려오면 눈길을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슬픔이 가라앉고 걱정과 분노가 풀릴 때까지 하염없이 걷다가 마음의 평온이 찾아오면 그 자리에 막대기를 꽂아놓고 되돌아선다고 한다. 걷는 것은 동물적 본능이고, 그 본능에 충실하다보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 같기도 하다.

삶의 갖가지 고민들은 해결된 것이 없는데, 그저 나이는 들고 있다. 하지만 잠언에 ‘백발은 빛나는 면류관, 착하게 살아야 그것을 얻는다.’고 했다. 어찌 보면 노년에 이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의 가호가 있어야만 가능한 축복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세상 돌아가는 것에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것은 아니다.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노인 문제는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노인 자신들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너무 오래 살게 되어 발생되는 문제 아닌가. 국가사회의 ‘노인 떼어놓기’도 고쳐져야 하지만, 본인 스스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누가 도와주지 않는다는 불평과 불만은 노년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면 답이 없다. 내 안 깊숙이 있는 불안과 불평을 떨쳐버리고, 이제 더욱 옳은 선택을 하자. 주변 살피지 말고 스스로 열심히 해결해 나가면 좋겠다. 알프레도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춤추라,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오면서 생긴 강한 자존감과 지나친 욕심은 좀 내려놓자. 나이와 함께 지혜가 자랐으면 좋겠다. 세상은 믿음과 희망으로 연결된다. 보살펴달라는 요구보다 노년들 덕분에 세상이 더 좋아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