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이사장.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이사장.

60세를 조금 넘긴 때의 일이다. 갑자기 오른쪽 다리가 찢어질 듯 아팠다. 지독한 통증으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근육통이겠거니 하고 며칠을 버텨보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흔히 디스크 파열이라는 ‘추간판 탈출증’으로 결국 수술을 받았다.

그 일이 벌어지기 몇 달 전. 새벽에 산을 뛰어 오르다 종아리 근육이 찢어졌다. 갑자기 팔꿈치 부분의 혈관이 터져 팔이 온통 피멍으로 물들기도 했다. “어르신, 준비운동도 하고, 그리고 이제 좀 살살하세요.”라고 의사한테 충고를 들었다. “뭐라, 어르신이라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엉덩이의 꽁지 뼈 부위가 헐도록 윗몸 일으키기를 해댔다. 배에 ‘왕’자를 새기면 어르신 소리 안 듣겠지, 그러다 결국 허리가 부러졌다.

그냥 ‘쿨’하게 어르신이라는 말을 받아들였으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온 세월이 전쟁 같아서 그런지 무엇이든 싸우듯 하는 걸 버리지 못하는구나! 사실 우리 세대는 절박감을 가지고 젊은 시절을 살았다. 그런데 그 절박감이 강박감이 되어버린 것 같다. 60대! 신체적 피로를 줄이면서 여유를 가져야 할 나이다.

이 시대의 초보노년들! 고도 성장기에 두세 사람 몫을 하느라 무리하면서 살아왔다. 경쟁사회, 피로사회, 과로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허덕였다. 불나방이 불빛만 쫒듯 살아오다 그 열기에 몸이 타들어간다. 숨 막히게 질주하다가 은퇴를 하면서 사막 한가운데에 선 낙타 신세가 됐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돋보기 없이는 글자를 잘 알아볼 수 없어 무척 자존심이 상한다. 미시감과 기시감도 우리들을 슬프게 한다. 여러 번 봤는데 한 번도 못 본 것 같기도 하고, 한 번도 안 봤는데 여러 번 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망각의 계절이 다가오는가? 

늙은 여자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늙은 여자라고.
늙은 남자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늙은 남자라고.

수메르 신화에는 노년이 존재하지 않는 황홀한 세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늙음을 부정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일 뿐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노년’이란 사람들을 나약함과 불안으로 떨게 한다. 기원전 700년 경 바빌로니아의 한 노인은 “나는 잊혀졌다. 나의 힘은 고갈되었고, 사람들에게 생기를 주는 포도주는 이제 내게 소용이 없다.”라고 한탄했다.

고대 로마의 시인 유브날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노인이 되길 원하는가?”라고 의문을 던졌다. 노년으로 접어든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나이 들면 노년이 된다. 인정해야 옳고 그래야 편하다. 노년은 단지 퇴적과 침식이 뒤바뀌는 시기일 뿐이다.

이제 나도 노년의 문지방을 넘어섰다. 결코 노인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회로부터 노인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간혹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겨워지는 것을 느낄 때는 “아! 나도 노년기로 접어들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노년을 인정하기란 정말 싫다.

노인인 듯 노인 아닌 햇노인들! ‘젊음 반 늙음 반’의 그들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다. 한물간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농익은 절정기다. 인생 여정은 방향전환의 과정이지만, 되돌아보고 쉴 때는 아직 이르다. 일도 더 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한 삶도 살아야 한다. 사회참여를 통해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해야 한다.

스스로 노년의 경계를 박차고 나오지 않는 한 그냥 노년으로 직행해버린다. “이젠 늙었으니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노년을 인정하되, 노년에 굴복하지 말았으면 한다.

요즘 ‘액티브 시니어’나 ‘골든 그레이’라 불리는 노년들이 늘고 있다. 돈이나 시간, 나이나 관습 등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여유 있는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피딩(feeding)족’이라 일컫는 노년들도 많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financial), 손자 육아를 즐기며(enjoy), 활동적이고(energetic), 헌신적인(devoted) 노년층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노년층이 많아지는 세상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