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륜 인덕대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오석륜 인덕대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1. 1971년 

 참 오밀조밀한 골목 많았다. 밤새 잠자고 있던 골목길을 아침밥 익어가는 소리가 깨웠다. 그 소리 사방으로 흩어지면 참새 떼도 아침을 먹고 있었는지 부지런히 허공을 쪼아댔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밥 좀 주이소, 밥 좀 주이소, 하는 동네 거지들의 외침도 대문을 두드리며 떠돌아다녔고, 사람들은 밥 한술 떠서 그들의 밥통을 채워주었다. 골목길은 그렇게 허기를 지우고 있었지만, 공동변소로 이어지는 길에는 배설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의 욕망이 줄을 서는 일이 많았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근처에 사는 벙어리 아저씨가 가끔씩 수화를 던졌지만, 어린 눈에는 그의 목에 걸려 있는 사연이 더 흥미로웠다. 그 어떤 동화의 문장보다 가슴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골목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면 원대시장이었다. 시장 안쪽에는 채소 도매상이 있었는데, 밤만 되면 높다랗게 배추와 무가 쌓였고, 그 위를 어둠과 침묵이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그들 무게를 고스란히 찍어낸 그림자마저 덮칠 듯 무너져 내릴 것 같았지만, 채소 더미에서 흘러나온 무 냄새는 동요의 한 구절처럼 포근했다. 같은 동네 사는 인호 형이 무 하나 꺼내 건네주면 이로 껍질을 벗겼다. 어둠이 벗겨졌고 배고픔도 벗겨졌다. 그때 그 어둠은 편안함을 가르쳐준 목화솜 이불 같은 것이었다. 나의 유년은 어둠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방법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엄마랑 손을 잡고 부민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갔을 때, 나는 좀처럼 울지 않던 엄마의 울음을 보았다. 신기했다. 같이 따라서 우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배우 윤정희가 예쁘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늦은 귀갓길을 밝혀주던 희미한 가로등보다 통금 사이렌에 깜짝 놀란 달빛과 별빛이 더 밝았다. 엄마 젖가슴에 파묻혀 아침까지 그들 빛이 꺼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아침햇살이 그들 빛을 먼저 끄고 나를 습관처럼 깨웠는데, 앞집의 생선가게 비린내도 덩달아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잘 적응이 되지 않던 비린내를 맡지 않게 된 것은 생선가게 식구들이 어느 날 야반도주하는 일이 벌어지고 나서였다. 아버지는 그들의 소문을 쫓아갔지만 오히려 그들의 슬픔만 어루만지다 돌아왔다는 정도만 동네에 떠돌았다. 모처럼 눈이 내릴 때쯤에는 그 소문도 죄다 덮여 버렸다. 시장에도 일상처럼 햇살이 비쳐 들어왔고 부지런히 살기만 했던 골목길에도 바람의 왕래가 잦았다. 꽃이 졌다가 피듯이, 증조할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막내 동생이 태어났다. 그리고 몇 년 후 몸이 아픈 어머니를 따라 나는 원대동을 떠났고, 그리움이라는 것이 정든 사람, 정든 동네를 떠나면서 생긴다는 것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2. 2013년

 그 옛날의 상호(商號) 대부분은 사라지고 없었다. 진미정육점, 이라는 색 바랜 간판은 살아남아, 이미 저승의 꽃이 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종찬이 어머니는 나를 보고 아버지의 얼굴이 보인다며 세월을 헤아린다. 이제는 골목길 오밀조밀하지 않지만, 이곳을 떠나지 않은 원주민들의 안부는 여전히 오밀조밀 살아 꿈틀거렸다. 키 큰 친구 양우는 벌써 며느리 봤다고 했고, 어렵게 살던 해수는 선생님이 되었다고 했다. 골목길에 머물던 그리움이 신작로 쪽으로 길을 튼다. 대륙사진관 집 딸이었던 이성미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달성초등학교 담벼락에 기대어 우리들의 손톱을 붉게 물들이고 싶어 했던 봉숭아꽃들, 그 향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천명 넘긴 내 삶을 하나하나 되묻고 있는 바람을 타고 재생과 망각이 파도 소리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