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등록  청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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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이 지은 『박헌영 평전(실천문학사, 2009)』을 계속하여 읽는다. 

박헌영의 아내 주세죽의 임신이 확인된 것은 1928년 초였다. 
박헌영의 정신도 차츰 맑아지고 있었다. 그는 간혹 주세죽과 함께 외출을 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조선일보」 사회부를 찾아갔는데, 좌익 기자 집단해고 때 함께 해고되었던 우익 기자들은 어느새 복직하여 근무하고 있었다. 주세죽은 사회부장으로 복귀한 유광렬에게 심정을 털어놓았다.  
“집안에만 있으니 답답해 하는 것 같아 데리고 나왔어요. 정신병이라 마음을 놓을 수 없어요”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 박헌영은 맞은 편 책상에 앉아 유광렬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었다. 유광렬은 박헌영이 진짜 정신병인가 알아보려고 원고지에 “나를 아느냐?”고 써서 보여주었다. 원고지를 받아 든 박헌영은 무심결에 “유광렬이를 몰라”하고 말해놓고는 스스로 놀란 듯 주세죽의 손을 잡고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박헌영은 고향 산양(충남 예산군)으로 내려갔다. 그는 병보석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실성한 모습을 위장하고 있었으나 모친 이학규는 아들이 정신이 돌아왔음을 누구보다 먼저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산양에 머물던 박헌영 부부는 주세죽의 친정인 함경남도 함흥으로 향했다. 아이를 낳기 위하여 처가로 간 것이다. 그런데 박한영의 목적은 처가살이가 아니라 소련으로 망명이었다. 하지만 사건이 상대적으로 적은 지방 경찰의 감시는 서울보다 더 심했다. 심지어 형사들이 화장실 앞까지 따라와 지키고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함흥 지역 운동가들이 박헌영 부부를 소련으로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을 꾸몄다. 탈출작전은 신의주를 통해 중국 내륙을 관통하거나, 두만강 상류를 건너 만주를 지나 국경을 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출산을 앞둔 주세죽을 데리고 박헌영이 탈출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박헌영과 동지들은 여러 가지 모색 끝에 곧 개통하는 함경선 철도를 이용하여 두만강 하구까지 진출하여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실행은 당대의 유명한 배우이자 연출가인 김용환이 맡았다. 그는 9월 1일 함경선 철도가 개통되어 기록영화를 촬영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박헌영 부부를 빼돌리기로 한 것이다.   

1928년 9월 1일 박헌영 부부는 남몰래 집을 빠져 나왔다. 주세죽이   만삭이 되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일본 경찰은 잠시 감시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박헌영은 잘 걷지도 못하는 주세죽을 부축하여 함경선 개통기념 열차에 올랐다. 김용환 연예단원들을 위한 전용 칸이었다. 기차의 다른 칸에는 일제 고관과 지역유지들, 경찰과 헌병 간부들이 타고 있었지만, 연예인으로 가장하여 전용칸에 올라탄 박헌영 부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기차가 청진을 지날 무렵 양수가 터져 버렸다. 주세죽은 기차 안에서 여자 아기를 낳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두만강 하구에 도착한 두 사람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이 깊어졌을 때 박헌영 부부와 갓난 아이를 태운 나룻배는 조선인 뱃사공이 노를 저은 가운데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안재성, 박헌영 평전, p 134-136 )
국경을 넘은 박헌영 부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국제혁명가 구원회’에 몸을 의탁할 수 있었다. 

주세죽과 아이는 비로소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박헌영은 아이의 이름을 ‘자신의 그림자’라는 뜻으로 박영(朴影)이라 지었다. 러시아어로는 ‘로제타 비비안나 박’으로 정했다. 아이의 생년월일은 1928년 9월 1일로 등재했다.  

박헌영 가족은 소련당국의 도움으로 1928년 10월 하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어 11월 5일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안재성, 박헌영 평전, p 138-140)

그런데 이런 와중에 박헌영이 『목민심서』를 휴대하고 조선을 탈출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더구나 1901년에 출간된 영인본은 48권 16책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인데 갓난아이까지 데리고서 휴대할 수 있었을까? 

따라서 1929년에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을 다닌 박헌영은 동급생 호찌민에게 박헌영이 『목민심서』를 선물하였다는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p 146) 글이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박헌영이 모스크바 현지에서 『목민심서』 영인본을 구하였다면 이해가 되나, 국내에서도 구하기 힘든 영인본을 구할 수 있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