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창업주 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사진=롯데지주)
롯데그룹 창업주 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사진=롯데지주)

"나는 운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 벽을 쌓아올리듯 신용과 의리로 하나하나 이루어나갈 뿐이다."

롯데그룹의 창업자인 故 신격호 명예회장은 1941년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학하며 와세다공업고등학교(와세다대학) 화공과를 졸업한 그는 1944년 화공 제품 사업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평소 그의 됨됨이를 알아봤던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하나미쓰라는 한 일본인 노인은 신 회장의 성실함과 신용을 담보로 사업 자금 6만엔을 모두 대겠다고 한 것. 당시 일류 회사원 월급이 80~100엔 정도였으니 굉장한 거액이다. 

그러나 미군기의 폭격으로 제품을 생산해 보기도 전에 위기를 맞는다. 그는 새로 공장을 마련해 제품 생산까지 성공하지만 또 폭격을 맞아 결국 공장 문을 닫는다. 사업자금 6만엔은 빚으로 남았다.

신 회장은 낙심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화장품 사업에 진출한 그는 하루 평균 200곳의 납품처를 돌아다닐 정도로 노력해 1년 반 만에 모든 빚을 갚았다.

롯데그룹 창업주 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사진=롯데지주)
롯데그룹 창업주 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사진=롯데지주)

이후 1948년 롯데를 설립하고 '껌' 단일 품목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당시 미군이 즐겨 씹던 풍선 껌에 사람들이 관심이 쏠릴 때라 영업이익률이 50%에 달해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이 탓에 전국에 껌 제조업체만 400곳에 달했다.

신 회장은 "다른 상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품질의 제품을 싸게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껌 제조에 착수했다. 그렇게 탄생한 '2엔짜리 풍선껌'은 롯데가 불과 20년 만에 일본 굴지 제과업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신 회장은 무리한 사업 확장은 경계하며, 적어도 하나의 제품이 80%의 목표를 달성하지 않으면 신제품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두고 사업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도전과 열정 정신을 갖추고 신사업에 도전하는 사업가였다. 정부의 정책 방향성 변화로 인해 무산됐지만 제철 사업까지 준비했던 신 회장은 국가 발전 및 국민들의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1970년대 호텔 건설을 제안받았을 때는 당시 경제 및 소득수준을 감안할 때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운 모험이었으나, 신 회장은 1000실 규모의 호텔에 더해 백화점과 오피스타운까지 동시에 건설하는 당시 전무후무한 복합개발을 구상하기도 했다. 당시 일류 호텔의 규모는 300실 정도였으니, 신 회장의 목표가 얼마나 파격적인지 알 수 있다.

1995년 8월 24일, 故 신격호 명예회장이 월드타워 관련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사진=롯데지주)
1995년 8월 24일, 故 신격호 명예회장이 월드타워 관련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사진=롯데지주)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된 123층 롯데월드타워도 신 명예회장의 혁신적 사고와 열정 및 추진력을 바탕으로 건립됐다. 소공동 롯데타운, 잠실 롯데월드, 그리고 롯데월드타워는 '가족 모두가 함께 즐겁게 지낼 행복한 공간'을 꿈꾼 신격호 회장 특유의 복합개발 방식과 규모를 잘 보여 준다.

이처럼 식품, 관광, 건설, 화학 등으로 진용을 갖춘 롯데는 재계 10위권에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빈손으로 일본에 건너가 사업을 하며 온갖 고난이나 불리함을 겪었음에도 신 회장은 신용과 의리,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는 이노베이터 정신,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한 덕에 성공할 수 있었다.

※ 이 글은 '한국경제를 만든 이 한마디'(FKI미디어 2015년 출간)의 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임을 밝힙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