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정치학 박사 / 前 국민일보 주필
이진곤 정치학 박사 / 前 국민일보 주필

 

그렇게 많고 격렬하던 '문빠'들은 다 어디 갔을까? 팬덤정치가 본격적으로 그 양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도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노빠',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이름을 가진 온·오프라인의 팬 집단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시대엔 '문빠',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 급속히 덩치와 목소리를 키우며 등장했다. 그 열렬하던 '노빠', '노사모'는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위세 대단하던 '대깨문'은 어디로

문 전 대통령의 팬덤은 노 전 대통령의 그것에 비해 더 격렬하고 투쟁적이었다. 문자와 댓글을 통한 반대편 공격이 대단히 거칠었다. 대통령 당선 이후엔 "이겼으니 우리 마음대로야!"라는 오만이 그들의 언어에서 넘쳐났다. 예컨대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것 다해"라는 생일 축하광고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의 결정판이었다. 

2017년 4월 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문 후보는 그날 저녁 MBN과의 인터뷰에서 오래 끌 논란거리를 만들었다. 그가 '우리 정당사상 가장 아름다운 경선'이라고 자평한 데 대해 앵커가 "18원 후원금, 문자폭탄, 상대후보 비방 댓글 등은 문 후보 지지자 쪽에서 조직적으로 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그런 일들은 치열하게 경쟁하다보면 있을 수 있는 일들이다. 우리 경쟁을 더 이렇게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었다." 문 후보의 대답이었다. 

취임 이듬해 1월 10일 그는 신년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조선비즈' 박정엽 기자가 댓글에 대한 불편을 호소했다.

문 대통령이 웃는 얼굴로 여유롭게 답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저보다 많은 악플이나 문자를 통한 비난을 받은 정치인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와 생각이 같건 다르건 유권자인 국민의 의사 표시라고 받아들입니다. 기자님들께서도 국민 비판에 좀 담담하게 생각하고 너무 예민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직후부터 박 기자는 엄청난 악플(악성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그날 오후 박 기자는 "문 대통령에 '과격댓글' 질문 박정엽 기자에게 쏟아진 건..."이란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문 대통령과 기자의 문답이 오간 이후 몇 분 지나지 않아 기자에게는 욕설 섞인 이메일과 SNS 메시지 수백 통, 포털 사이트에 올라간 기사 댓글 수천 건 등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관인대덕寬仁大德: 너그럽고 인자한 덕)에 스스로 흡족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기자의 처지는 달랐다. 그것도 천양지차(天壤之差: 하늘과 땅 사이와 같이 엄청난 차이)로! 기자에겐 대깨문과 같은 지원‧옹호세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재명의 주저 없는 친문 배제 공천

그랬던 문 전 대통령이 지금은 아주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로부터 인정사정없는 무시와 조롱을 당하면서도 항변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있다. 머리가 깨지더라도 문재인을 지키겠다며 비판자들을 을러대던 '대깨문'도 '문빠'도 조용하다. 우파 정당과의 싸움이라면 팔 걷어붙이고 나설 수가 있겠지만 같은 편으로 부터 당하는 모욕·홀대에는 대응할 방법이 마땅찮은 모양이다. 

지난 2월 4일 문 전 대통령은 양산의 평산마을 자택을 방문한 민주당 이 대표를 만나 '명문정당'의 '하나 됨'을 역설했다. 이 대표는 이 자리에서 "민주당은 용광로처럼 분열과 갈등을 녹여내 단결하고 총선 승리를 위해 총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문 전 대통령은 이 대표가 정말로 '명문정당'의 정신을 실천할 줄 알고 "이 대표와 가까운 분들이 양보하면 국민들이 평가해 줄 것"이라는 가당찮은(결과적으로) 주문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는 친문 중진들에 대한 이른바 ‘학살 공천’이었다. 문 청와대의 실세였던 임종석 전 비서실장, 홍영표·송갑석·윤영찬·전해철·도종환 의원 등은 공천에서 배제되거나 친명계 인사들과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이 대표는 친문 쪽에서 탈당 가능성을 흘리고 있는 것에 대해 '입당도 탈당도 자유'라는 말로 무시해버렸다. 지난 28일엔 이 대표가 몇몇 의원들과 '친명단수 비명경선'이라는 비명계 쪽의 비판을 조롱하는 듯한 말을 나누며 크게 웃는 장면이 온라인상에 퍼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 전 대통령으로서는 지리멸렬한 친문세력을 끌어안아봐야 향후의 안전을 보장받기는 글렀다. 그렇다고 민주당 이 대표를 믿을 수도 없겠지만 그의 분노, 더 심하게는 적개심을 자극한다는 것은 엄두조차 못 낼 처지다. 파괴의 교의로 무장된 운동권 출신 인사들에 의존해 정치를 해온 결과다. 그들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그는 직전 정권은 물론 그 전 정권에 대해서도 '적폐'의 책임을 아주 준엄하게, 그러면서도 즐기듯이 따졌었다. 이제 자신의 정부와 정권이 운동권의 교의를 앞세워 만들어낸 '적폐'의 책임을 추궁당할 때다. 누구도 선뜻 나서서 "내 탓이오"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응보는 거의 전적으로 문 전 대통령 자신의 몫이 되고 만다. 이것 까지도 감안하면서 향후의 정치적 행보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충신‧개딸들도 언젠가는 흩어진다

민주당만을 두고 말한다면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재명 세상'이다. 그의  정치적 멘토라는 이해찬 전 당 대표가 임 전 비서실장을 중·성동갑 선거구에 공천해야 한다고 조언했던 모양이나 무위로 끝났다. 이 대표로서는 보은(報恩: 은혜를 갚음)을 위해 자신의 손실을 감당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민주당의 총선승리가 아니라 이재명의 완전한 당 장악이다. 그러니까 22대 총선이야말로 '이재명의 민주당'을 완성하는 절호의 찬스라고 할 수 있다.

계산이 그렇다면 친문 중진들을 비롯, 세력화의 역량이 있는 인사들에게 차기 국회의석을 나눠줄 수 있을 리 없다. 자신의 강력한 도전자가 될 사람에 대해서는 더더욱 거두어줄 관용이나 배포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원내 제1당의 지위를 잃을지 모르지만 분열 위험성이 상존하는 다수보다 빈틈없이 결합된 소수를 지휘하는 게 승장(勝將)이 될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여길 법하다.

이 대표는 22대  국회의 민주당 소속 의원을 전부 자기 심복으로 채운다면 차기 대권을 장악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을 수 있다. 민주당이 강력한 충성 대오를 유지케 한다면 대선 때까지 자신의 사법리스크도 해소시키거나 완화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음직도 하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 행태를 돌아본다면 그 기대가 얼마나 허황한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나선 이후 지금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이 전 당 대표의 신세를 톡톡히 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그 사람의 당부를 정면으로 거부해 버렸다. 자신이 그럴 수 있었던 일을 다른 사람들이라고 못하겠는가. 은혜 혹은 신세에 대한 망각과 배신에서 자신보다 능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라는 점을 유념할 일이다. 확언컨대 개인에 대한 충성심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측근임을 과시하는 사람, 철벽처럼 자신을 지켜주는 것으로 여겨지는 '개딸'들도 머지않아 연기처럼 흩어지고 만다. '노사모', '대깨문'도 당시엔 절대로 흩어지지 않을 세력이라고 인식됐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어디 있는가? 그들이 건재하다면 이 대표 자신이 지금처럼 세력을 과시하며 즐길 수 있겠는가? 야권 내에서 유력자가 등장하면 '개딸'들은 떠나가고 말 게 뻔하다. 그런 다음엔 이 대표 혼자 남게 된다. 양산 평산마을의 책방 주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