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등록  청렴강사.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등록  청렴강사.

안재성은 『박헌영 평전』에서 박헌영(朴憲永 1900-1956)과 호치민이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을 책 앞부분(P 4)에 수록하고, ‘1929년 모스크바 국제 레닌학교 재학 중,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김단야, 박헌영,   양명이 나란히 앉아 있다. 뒷줄 맨 왼쪽은 베트남의 호치민,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주세죽이다.’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다. 

사진=김세곤 제공
사진=김세곤 제공

이 사진의 출처는 2004년에 임경석 교수가 출간한 『이정 박헌영 일대기』에 실린 사진인데, 임경석 교수는 이 사진에 ‘주세죽(박헌영의 아내)의 유품에서 - 박비비안나(박헌영의 딸) 제공’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이러자 박헌영과 호치민이 함께 찍은 사진을 의심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진 1 박헌영과 호치민이 같이 찍은 사진 (2009년 『박헌영 평전』)

이어서 안재성은 『박헌영 평전』 p 146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국제 레닌학교는 박헌영의 입학 신청에 어떤 이의도 달지 않고,1929년 1월 18일 날짜로 입학을 허가 했다. ... 국제레닌학교는 일본어나 조선어는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헌영은 영어로 수업하는 반에 편성되었다. 영어 수업 외에 프랑스어 · 중국어 ·스페인어 ·헝가리어 ·아랍어 루마니아어 ·핀란드어 · 인도어 수업이 있어 학생들은 각자 익숙한 언어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학생 중에는 베트남 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호치민도 있었다 한자 발음대로 호지명이라 불리던 그는 박헌영과 각별히 친해서 조선의 역사와   상을 알게 되었다. 박헌영은 그에게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를 선물했다. 나라의 관리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인민을 대해야 하는가를 기록한 이 책은 장차 베트남의 지도자가 되는 호치민에게 평생의 지침이 되었다. 28) 

그리고 주 28)(책, p 627)에 이렇게 적었다.

“박헌영이 준 『목민심서』는 베트남 하노이의 호치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박헌영은 이 책에 친한 벗이란 뜻의 붕우(朋友)라는 한자가 포함된 서명을 하여 선물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쟁점은 박헌영과 호치민이 모스크바 레닌 국제학교에서 만났는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2011년 5월 17일에 조선대학교 ‘한국 베트남 국제학술대회’에서 최근식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박헌영이 1929년 국제 레닌학교 재학시절 찍은 사진의 호치민은 얼굴 등이 판이하며, 박헌영(1900∼1956)과 호치민(1890∼1969)의 연표를 보아도 두 사람은 만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우선 호치민(1890∼1969) 연보를 살펴보자.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에 따르면 1890년에 호치민(원래 이름은 ‘응엔 신 꿍’)은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세에 조세 반대 시위를 벌이다 퇴학당하면서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1911년 21세의 호치민은 조국을 떠나 세계 각국으로 유랑했다. 그는 외국 배에 올라 요리사 보조 일을 하며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후 그는 각종 잡일을 하면서 프랑스,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알제리아, 미국, 영국 등 세계를 일주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호치민은 ‘응엔 아이 꾸옥’(애국자란 뜻)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베트남 애국자 연합’을 결성하고 <베트남 민족의 요구> 글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호치민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1922년에는 <르 파리아>를 창간하고 편집인이자 주요 기고자로 활동하였고, 1923년 6월에는 모스크바로 탈출 코민테른 극동국에서 근무하였고, 12월부터 스탈린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1924년 11월에 중국 광저우에 도착하여 활동하다가, 1927년 5월 공산주의자 검거 선풍을 피해 홍콩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도피했고 11월 에는 파리, 베를린에 머물며 활동했다. 그는 1928년 7월 시암(태국) 방콕에 도착하여 친 신부로 행세했고, 시암에서 2년간 머물면서 활동했다. 1930년에 호치민은 홍콩에서 베트남공산당을 창당했고, 1931년 6월에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 체포되어 1932년 12월 석방되었다. 

이를 보면 호치민은 1929-1931년에 러시아 모스크바에 산 적이 없다.   
따라서 박헌영이 1929년 국제 레닌학교 재학시절 찍은 사진의 호치민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안재성은 『박헌영 평전』에서 호치민 연보마저 오류를 범하는 
역사왜곡을 한 것이다. 안재성은 왜 이런 왜곡을 하였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