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호 신임회장이 영업회의에서 영업사원을 격려하고 있다(왼쪽 위아래), 1984년 한국신동공업인수 및 미국 스키보제약과 합작 투자 조인식의 강신호 회장(오른쪽 위아래)/사진=동아제약
강신호 신임회장이 영업회의에서 영업사원을 격려하고 있다(왼쪽 위아래), 1984년 한국신동공업인수 및 미국 스키보제약과 합작 투자 조인식의 강신호 회장(오른쪽 위아래)/사진=동아제약

“늘 꽃밭만 걸을 순 없지 않나..”

평생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생명보다 더 큰 가치는 없다"는 신념으로 한평생 의약품 선진화을 위해 헌신했던 '박카스의 아버지' 동아쏘시오그룹 강신호 명예회장이 2011년 보건복지부의 약가인하 결정을 앞두고 한 말이다.

보건복지부의 약가인하 결정으로 정부에 대한 항의에 앞장서 주기를 바라는 제약업계가 인력감축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강 회장은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강 명예회장은 “우리 회사도 매출이 감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동아제약도 늘 꽃밭만을 걸어온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대장정에는 가시밭길과 진흙길도 있었고 폭우가 내리기도 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선친이자 동아제약 창업자인 동호(東湖) 강중희 사장의 창업철학과 솔선수범했던 삶과 교훈에서 비롯됐다.

2010년 5월 11일  동아제약 강신호 명예회장이 GSK와 전략적 제휴 체결했다/사진=동아제약
2010년 5월 11일 동아제약 강신호 명예회장이 GSK와 전략적 제휴 체결했다/사진=동아제약

1927년 경북 상주에서 故 강중희 동아쏘시오그룹 창업주의 1남 1녀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난 강 회장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박사를 거친 뒤 1959년부터 동아제약에 몸담았다.

강 명예회장이 독일으로 유학갔던 시기는 대한민국이 후진국으로 약소국의 위치였듯이 유학 생활이 결코 지금의 유학과 비교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이었다. 그 어느 국가보다도 박사학위 취득이 힘들다는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한 강 명예회장의 “늘 꽃밭만 걸을 순 없지 않나”는 말에서 뜨거운 진심을 느꼈고 누구나 고개를 숙이며 숙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에 강 명예회장은 보건복지부의 약가인하 정책에 대해 인위적 구조조정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제약업계에 공언했다.

강 명예회장은“고비 때마다 직원 한 명 한 명이 하나로 뭉쳤기 때문에 오늘의 동아제약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회사가 현재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헤쳐나가며 고용안정과 더 많은 일자리 창출을 주도하는 좋은 본보기가 됐으면 합니다”며 “외부 환경을 탓하기보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잠재능력을 발휘하는 자기 혁신의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아울러 강 명예회장은 경제가 어려움에 빠져드는 원인은 ‘기업의 노력과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제약업계가 복제약 판매에 열 올리며 상대적으로 신약개발에 등한시해온 사실을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점을 먼저 언급하며 반성을 촉구한 동아제약의 강 명예회장의 발언은 모든 제약업계 관계자에게 묵직한 울림을 전달했다. 1963년 8월 출시한 피로회복제 ‘박카스 D’ 성공은 동아제약의 제품개발에 활기를 불어넣고 제품구조 혁신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그러한 성공에는 1959년 입사한 강 명예회장이 전무로 진두지휘하며 동아제약을 정상의 자리로 끌어올린 일등공신인 사실은 누구나 인정했다.

2005년 3월 박카스 D 발매 기념식의 강신호 명예회장/사진=동아제약
2005년 3월 박카스 D 발매 기념식의 강신호 명예회장/사진=동아제약

실제로 ‘박카스 D’가 그 당시 도산 위기에 놓였던 회사를 일으키는 활력소였다. 1965년 2억8,700만원이던 ‘박카스 D’의 매출은 2년만에 19억 8,150만 원의 판매실적을 올렸다. 이에 동아제약이 1965년 생산실적 5억9,000만원으로 국내 의약품 전체의 8.3%에서 1967년 17억 1,273만 원으로 13.6%로 급성장해 국내 제약업계의 정상을 차지했다.

그리하여 1975년 3월 1일 강 명예회장은 동아제약 2대 사장에 취임하며 “기업은 사명으로 하는 것이고 제약기업은 특히 그러하다”며 “앞으로 치료제 연구개발에 중점을 두고 사업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강 명예회장은 ‘박카스 D’ 성과를 이어나가기 위해 유통구조를 개선한다는 방침아래 국내 최초로 독자적인 시판제도 DSC(DongA Sales Circle)를 도입하고 주식 공개와 경영합리화를 선도했을 뿐 아니라 음료 시장과 원료 합성 분야에 진출함으로써 경영 다각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강 명예회장은 동아제약의 치료제 연구개발을 위해 1977년 7월 국내 제약업계 최초로 중앙연구소를 발족해  치료제개발이 1977년 5건에서 1979년 14건으로 늘어나는등 기초원료 의약품 합성연구와 함께 동아제약이 본격적인 연구개발 시대를 열어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연구개발의 선구자적 경영과 실천의 강 명예회장이 ‘기업의 노력과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발언은 “늘 꽃밭만 걸을 순 없지 않나”와 함께 당시 제약업계에게 자기반성과 연구개발을 위한 개혁의 초석과 원동력이 되었다.

강 명예회장의 “금광개발 확률은 10%, 유전개발 확률은 5%인데 신약개발 확률은 0.02%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신약개발은 생명을 살리는 일인 만큼 우리는 0.02%의 확률을 두려워해선 안됩니다”라는 말은 아직도 국내 모든 제약업계에게 영원히 기억해야하는 유훈처럼 전해지고 있다.   

강 명예회장은 2017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약 42년간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1975년 당시 145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던 동아제약을 오늘날 글로벌 종합 헬스케어 그룹으로 도약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0년 경기도 안양에 우수의약품 제조관리기준(KGMP)에 맞는 현대식 공장을 준공했고, 1985년에는 업계 최초로 GMP 시설을 지정 받았다.

1977년 제약업계 최초로 기업부설 연구소 설립에 이어 1988년 제약업계 최초로 경기도 용인에 신약의 안전성을 실험할 수 있는 우수 연구소 관리 기준(KGLP) 시설도 마련했다.

2004년 강신호 명예회장 전경련 회장 취임식 모습/사진=동아제약
2004년 강신호 명예회장 전경련 회장 취임식 모습/사진=동아제약

강 명예회장은 평소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힘썼다. '사회'라는 의미가 담긴 라틴어 '쏘시오(SOCIO)'를 넣어 1994년 동아제약그룹을 ‘동아쏘시오그룹’으로 명칭을 바꾼 것도 강 명예회장의 의지의 표현이다. 강 명예회장의 경영방침에 따라 해외에서도 꾸준희 신약연구개발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강 명예회장은 1987년 사재를 출연해 수석문화재단을 설립해 장학 사업, 평생교육 사업, 교육복지 사업 등을 후원했다. 수석문화재단 장학생은 설립 후 지금까지 1900명이 넘는다.

이와 함께 1987년 한국제약협회 회장을 역임한 후 제약산업 경영인으로는 최초로 2004년과 2005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제 29대 및 30대 회장을 맡아 전경련의 위상 제고와 함께 제약산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조했다.

※ 이 글은 '한국경제를 만든 이 한마디'(FKI미디어 2015년 출간)와 '동아제약 90년사'의 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임을 밝힙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