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륜 인덕대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오석륜 인덕대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아침에 일어나 쇠로 된 문고리를 열어젖히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밤새 잠자는 동안, 마당과 지붕에 소복소복 쌓이던 눈은 집 아래 도랑으로도 달려가, 얼어붙은 도랑에 귀를 대고 밑바닥에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올산리의 겨울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탓에 눈의 나라였다. 겨울바람에 하얀 엽서를 주고받는 것, 그것이 산과 산이 서로 안부를 묻는 방식이었다. 마을 여기저기에 띄엄띄엄 흩어져 있던 몇 가구 안 되던 집들, 그들 굴뚝에서 퍼져나오는 연기도 허공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호롱불로 밤을 밝히며 큰마을에서, 새터에서,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다 할아버지 집이 있는 언덕마을까지 올 때 길을 밝혀준 것은 달빛이었다. 산 동네를 허벅지까지 에워쌌고 있던 눈이었다. 내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던 것은 길옆 성황당을 지날 때마다 귀신과 귀엣말을 주고받던 묏바람이었다. 그래도 그 광경을 지켜보며 밤길 넘어지지 말라며, 미끄러지지 말라며, 한 마디씩 던져주던 부엉이들의 목소리는 따뜻한 동행이었다. 소백산을 헤쳐나와 산골 마을까지 흘러온 작은 개울을 따라 내 그림자도 흘러가고 있었다. 어깨동무한 채로 산과 산이 정답게 잠자고 있는 틈에서 흘러나온 산짐승 소리가 나를 따라오는 일도 있었다.  

 1970년대, 1980년대 초,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에서 내가 겪었던 겨울 풍경이다. 지명이 된 대강면의 대강(大崗)은 큰 산등성이, 라는 뜻이고, 올산리의 올산(兀山)은 실제로 존재하는 해발 858미터의 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올산리는 그렇게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마을이다. 우리 집안은 그곳에서 몇 대를 살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고,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산골짜기, 오지, 라는 표현이 적절한 이곳을 떠나 일찍이 도시로 나간 아버지는 이곳을 버릇처럼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부르곤 했다.    

 나는 이 산들에 둘러싸인 마을 풍경을 잊을 수 없다.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지만, 지금도 몇십 년 전의 기억을 생생하게 파노라마처럼 펼쳐낼 수 있다. 화가는 아니지만 그림으로 그려낼 수도 있다. 아니, 그리움처럼 그 풍경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혹은 잠이 들 무렵, 이 풍경을 그려내면 스르륵, 잠이 드는 일이 많다. 그곳에서 뛰어놀던 바람이 나를 찾아와 자장가를 불러주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초중고를 다녔던 나는 할아버지가 계신 그곳에서 방학을 보낸 일이 많았다. 우리 집안이 살았던 집도, 훗날 할아버지가 살았던 집도,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있는 추억이여, 그리움이여. 지금도 쇠로 된 문고리를 열어젖히면 눈이 내리고 있을 것 같은 풍경이 꿈에 나타난다. 

 잠이 오지 않을 때, 혹은 잠이 들 무렵, 올산리의 겨울 풍경을 그려내면 스르륵, 잠이 든다. 조만간 그곳을 찾아 사라진 집터에 서서,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불러보리라. 아등바등 정신없이 살아온 나도 불러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