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륜 인덕대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오석륜 인덕대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따뜻한 봄 햇살이 서해 여기저기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바다의 몸을 덥혀주고 있었다. 20도 가까운 기온이라면, 바다와 봄 햇살이 합궁하여 옥동자라도 낳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3월 하순의 어느 날에 ‘간월암’을 찾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의 틀을 다진 무학대사가 달을 보다가(看月) 도를 깨우쳤다는 뜻을 지닌 간월암은 간조 시에는 육지와 연결되고 만조 시에는 섬이 되는 신비로움을 지닌 곳. 서울에서 출발할 때 겨울 외투를 준비하고 간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꾸짖고 가는 봄바람도 잔잔한 미소로 떠다니는 이곳에서 불심으로 자란 듯한 250년 된 사철나무와 150년 된 팽나무가 곧 꽃을 피울 것 같았다. 범종각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바다를 떠돌던 새들이 모여들 것만 같았다. 간월암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어리굴젓을 맛본 후 순교자들의 무덤인 ‘해미국제성지’로 발길을 옮겼다. 

 해미천 좌우 주변에서 1866년부터 1872년 사이 6년간 무려 1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신자들이 생매장당하였으며, 이 순교자들의 유해는 대부분 홍수로 유실되고 1935년 그 일부를 발굴하였다는 해미국제성지에 깃든 천주고 박해의 잔혹함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순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의 신앙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곳이 위치한 해미면(海美面)의 ‘해미’라는 이름만 보면 바다가 아름답다는 뜻인데, 형언할 수 없는 무자비한 박해의 역사를 지닌 곳이기에 커다란 괴리가 생겼다.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왜 해리면인가 궁금하여 검색해보니, “1407년(태종 7) 정해현(貞海縣)의 ‘해’자와 여미현(餘美縣)의 ‘미’자를 따서 해미면이라 이름하였다”는 정보가 뜬다. 영면하지 못하고 해미천을 맴도는 슬픈 원혼들에게 따스한 봄 햇살이 가득 내리쬐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그리고 봄을 대표하는 꽃의 하나인 수선화로 유명한 ‘유기방가옥 수선화 축제’를 찾았다. 유기방 가옥(충남민속문화재 23호)은 1900년대 초에 건립된 일제 강점기의 가옥으로 면적은 4,770㎡로 평으로 계산해보면 1445평 정도. 낮은 야산에 소나무 숲과 함께 수선화가 펼쳐진다. 그러나 아쉽게도 수선화를 만개하게 할 만큼의 봄은 아니었는지 햇살 좋은 남향에만 일부 피어 있었다. 문득, ‘자기 사랑’, ‘자존심’, ‘고결’, ‘신비’라는 꽃말처럼 일조량과 시간이 하락해야만 피는 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꽃잎이 가진 빛깔은 고결하고 신비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수선화인가, 혹은 나 수선화로 피어나 그대 품에 안길 수 있을까’하는 시가 저절로 내 머릿속에 그려진다. 더불어 “홍진(紅塵)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生涯) 엇더ᄒᆞᆫ고(1행)-속세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이 나의 삶이 어떠한가?/ 녯사ᄅᆞᆷ 풍류(風流)ᄅᆞᆯ 미ᄎᆞᆯ가 못 미ᄎᆞᆯ가(2행)-옛 사람의 풍류에 미칠까 못 미칠까.”로 시작되는 최초의 가사 형식을 갖춘 시로 평가받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이 지은 시 상춘곡(賞春曲, 시는 전체가 39행)을 떠올린다. 

 오랫동안 아름다운 기록으로, 그리고 따뜻한 추억으로 살아 있을 충청남도 서산에서의 나의 상춘(賞春)이여.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춘분을 며칠 지난 해가 나를 쉬 놓아주지 않는 봄날의 한때여. 또 만나세, 봄 햇살 가득했던 서산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