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일본의 노사임금협상 춘투(春鬪)는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렌고, 連合)가 ''렌고백서'를 내면서부터 시작된다. 올해는 만액회답(滿額回答)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들려온다. 노조가 내놓은 임금인상 요구안을 회사가 100%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협상이랄 게 따로 없이 싱겁기 짝이 없고 싸울 투(鬪) 자를 붙이는 게 이상할 정도다.

춘투의 모든 과정은 렌고백서에서 제시된 일본 경제를 보는 시각에 기본하고 있다. 여기에는 일본 경제의 장단점, 미래를 위해 고려해야 하는 사안 등을 망라해 국가정책백서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심지어는 근로자를 대상으로 일하는 방식을 문제삼기도 하고 대·중소기업 간 임금격차 해소 등을 주문하기도 한다.

몇 해 전 도요타 자동차 노조는 회사 측의 임금인상안을 거부하기도 했다. 회사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서 인상률이 너무 높다는 이유였다. 이 회사 노조는 2019년부터 임금인상률을 공개하고 있지 않다. 렌고 협력사가 도요타의 임금협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 수준 또는 이하로 임금을 올리는 관행을 깨고 도요타보다 높은 인상률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반면 우리나라의 현대, 기아차 노조는 지난해 특별상여금으로 1인당 평균 3000만원을 챙겼다. 웬만한 협력업체 근로자의 연봉 수준이었다. 그런데 해가 바뀌자 또다시 특별성과급을 요구했다. 있을 때 빼먹자는 한탕주의식 노동운동이 일본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일본 정부의 규제완화도 그 속도와 규모에 주목할 만하다. 대만의 반도체 업체인 TSMC는 최근 일본 구마모토에 반도체 제조공장을 준공했는데 착공에서부터 22개월이 걸렸다. 공장을 짓는데 365일 24시간 공사는 기본이고 제1공장에 4760억엔(4조2000억원)이 지원됐고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하는 제2공장에는 7300억엔(약 6조 5000억원)을 보조금으로 책정됐다. 일본 인구를 1억명으로 보면 외국기업 하나에 일본 국민이 한 사람당 10만원씩을 보조금으로 주는 셈이다. 도쿄 도심지 곳곳의 용적률, 고도제한, 건폐율 등 규제를 완화하니 건설경기가 살아나고 새롭게 태어난 도시를 보러 관광객이 끝없이 달려와 '관광세'를 거둔다고도 한다.

반면 우리는 2019년 2월 용인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키로 했는데 착공이 3년이나 지연됐다. 각종 환경평가, 시민단체의 제동에 지방정부의 몽니까지 겹쳐 아직까지도 터닦기 수준의 공사만 진행되고 있다. 정치가 사사건건 기업을 덮쳐 52시간제, 횡재세, 노랑봉투법 등으로 기업을 옥죄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버티는 게 용할 정도다.

잃어버린 30년을 지나며 일본의 주식은 '오와콘'(끝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9년 12월 29일 버블경제 정점에서 기록한 닛케이지수 38,915.82는 다시는 넘을 수 없는 천장처럼 보였다. 그러나 노조의 유화적 태도나 정부의 규제완화가 이뤄지자 일본의 밸류업이 시작됐다. 마침내 지난 2월 22일 닛케이지수가 39,098.68을 기록하며 무쇠뚜껑을 밀쳐내고 천장을 뚫었다. 34년만의 일이다.

그런데 세계 GDP 순위에서 일본은 지난해 4위였던 독일에 추월당했다. 1968년 당시 서독을 제치고 세계 2위를 차지했다 2010년 중국에 추월당해 3위로 내려앉기는 했다. 그러다 2023년 독일에 밀린 것이다. 인구 1억2000만명의 일본이 10배가 넘는 인구의 중국에 추월당한 것은 이해할 만 하나 8000만 인구의 독일에 밀린 것은 충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동요는 없다. GDP가 지금까지의 성적표라면 주가지수는 미래에 받아볼 성적표이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에 시장은 믿음으로 보답하고 있다. 우선 기업들의 돈 버는 힘이 강해졌다. 2010년 2%대였던 기업의 매출 대비 경상이익률은 지난해 6%로 높아졌다. 증시를 주도하는 '사무라이 7' 기업에는 자동차업체(도요타, 스바루), 종합상사(미쓰비시) 외에 반도체 장비기업 4곳(스크린 홀딩스, 어드반테스트, 디스코, 도쿄 일렉트론) 등 기술력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하이테크 기업들이 포진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추진 중인 배당확대나 자사주 매입 권고 등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일본과 비교해 보면 대증요법에 불과하다. 지금부터라도 적어도 10년을 내다보고 정치, 경제, 사회의 체질 개선을 도모하여야 한다. 정치와 행정이 사사건건 시장이나 기업에 개입하는 것은 국가 밸류업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투쟁에만 몰두하는 노동운동도 큰 장애물이다. 일본의 밸류업에 주목하는 것은 이런 경제, 사회적 변화를 과연 우리도 이끌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고 여기에 우리나라의 미래도 달려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규제완화, 온건한 노조, 낮은 세율, 재산권 존중은 '영혼의 투자자로 추앙받는 존 템플턴이 제시한 투자 적합 국가의 조건이다. 우리가 밸류업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이자 기본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는 어디를 돌아봐도 이런 공약은 보이지 않는다.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