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기술과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도록 철저하게 관리해 나가며 연구부문에서는 독자기술을 개발해 경쟁력의 바탕으로 삼고, 영업 일선에서는 가장 먼저 고객에게 달려가 그들의 소리를 듣고 고객니즈를 만족시켜갈 수 있어야 합니다.” <2001년 12월 올해의 효성인상 시상식에서>
고(故)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은 기술 중시 경영의 선구자로 평가받을 만큼 생전 기술에 대한 집념이 상당했다.
29일 효성그룹에 따르면 나일론, 폴리에스터 등 합성섬유로 성공한 뒤 합성수지인 폴리프로필렌에 도전했던 1980년대 당시만 해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면 정부의 허가도 받아야 하고 기술적 기반도 약해 뛰어들기 쉽지 않았다.
경쟁사들도 늘어나고 있는 시기여서 회사 내부에서는 "이 사업을 하고 싶지만 안하는 게 좋겠다"고 만류하는 목소리가 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조 명예회장은 '안되는 이유 백 가지' 보다 '되는 이유 한 가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 정도의 어려움은 도전정신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폴리프로필렌의 원료인 나프타는 선발업체들이 선점한 상황이었고, 일본에서도 구할 수 없었으나 수소문 끝에 미국의 한 회사에서 가스에서 수소를 추출해 프로필렌을 만드는 탈수소공법을 적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직 개발 중인 신공법인데다 이를 상업화할 기술이 없었으나 조 명예회장은 용단을 내렸고, 결과적으로 사업은 큰 성공을 거뒀다. 구창남 전 동양나이론 사장에 따르면 공학도 출신의 조 명예회장은 치밀하게 분석하고, 기술을 이해한 뒤 확신이 들면 사업을 전개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조석래 명예회장의 기술에 대한 집념을 보여주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조 명예회장은 결혼식 후 신혼여행을 이탈리아 포를리라는 곳으로 갔는데, 이 지역은 당시 동양나이론의 기술자들이 나일론 생산기술을 익히기 위해 연수를 받고 있던 곳이었다. 조 명예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직접 기술연수를 받기 위해서 신혼여행지를 택할 정도로 기술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그가 일본 와세다 공대를 거쳐 미국 일리노이공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것부터도 이례적인 행보였다. 지금은 IT가 미래 유망업종이지만 조 명예회장이 공부할 당시 '부잣집 아들'이 공학을 배우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석래 명예회장은 무슨일이든 직접 나서서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실무진과 토론도 많이 했고, 임원들도 생각이 다르면 조 명예회장에서 그건 틀린 것 같다며 건의하기도 했다. 조 명예회장은 아무리 부하직원이라도 전문지식과 확신을 갖고 이야기하면 받아들였다. 반대로 잘못이나 약점을 감추려는 사람은 질타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만큼 솔직하고 소탈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해외 출장을 갈 때도 수행원 없이 늘 혼자 다닐 정도로 허례허식을 싫어했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의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정철 전 효성물산 전무의 말에 따르면 홍콩 주재원 당시 경비실에서 '미스터 조'라는 분이 찾아왔다는 연락이 와서 내려가 보니 조 명예회장이 가방을 들고 혼자 서 있었다. 정철 전 효성물산 전무는 “당시 깜짝 놀랐지만 조 명예회장이 정말 소탈한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고 소회했다.
과거 일본에 출장을 갈 때는 자동차를 고집하기 보다 전철을 이용했다고 한다. 멋지게 폼잡는 것보다는 시간약속을 지키기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전철을 이용하는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