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기술과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도록 철저하게 관리해 나가며 연구부문에서는 독자기술을 개발해 경쟁력의 바탕으로 삼고, 영업 일선에서는 가장 먼저 고객에게 달려가 그들의 소리를 듣고 고객니즈를 만족시켜갈 수 있어야 합니다.” <2001년 12월 올해의 효성인상 시상식에서>

고(故)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은 기술 중시 경영의 선구자로 평가받을 만큼 생전 기술에 대한 집념이 상당했다.

29일 효성그룹에 따르면 나일론, 폴리에스터 등 합성섬유로 성공한 뒤 합성수지인 폴리프로필렌에 도전했던 1980년대 당시만 해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면 정부의 허가도 받아야 하고 기술적 기반도 약해 뛰어들기 쉽지 않았다.

2004년 4월 중국 가흥 타이어코드공장 순시. / 사진제공=효성
2004년 4월 중국 가흥 타이어코드공장 순시. / 사진제공=효성

경쟁사들도 늘어나고 있는 시기여서 회사 내부에서는 "이 사업을 하고 싶지만 안하는 게 좋겠다"고 만류하는 목소리가 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조 명예회장은 '안되는 이유 백 가지' 보다 '되는 이유 한 가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 정도의 어려움은 도전정신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폴리프로필렌의 원료인 나프타는 선발업체들이 선점한 상황이었고, 일본에서도 구할 수 없었으나 수소문 끝에 미국의 한 회사에서 가스에서 수소를 추출해 프로필렌을 만드는 탈수소공법을 적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직 개발 중인 신공법인데다 이를 상업화할 기술이 없었으나 조 명예회장은 용단을 내렸고, 결과적으로 사업은 큰 성공을 거뒀다. 구창남 전 동양나이론 사장에 따르면 공학도 출신의 조 명예회장은 치밀하게 분석하고, 기술을 이해한 뒤 확신이 들면 사업을 전개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조석래 명예회장의 기술에 대한 집념을 보여주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조 명예회장은 결혼식 후 신혼여행을 이탈리아 포를리라는 곳으로 갔는데, 이 지역은 당시 동양나이론의 기술자들이 나일론 생산기술을 익히기 위해 연수를 받고 있던 곳이었다. 조 명예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직접 기술연수를 받기 위해서 신혼여행지를 택할 정도로 기술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976년 11월 창립 10주년 기념식. / 사진제공=효성
1976년 11월 창립 10주년 기념식. / 사진제공=효성

그가 일본 와세다 공대를 거쳐 미국 일리노이공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것부터도 이례적인 행보였다. 지금은 IT가 미래 유망업종이지만 조 명예회장이 공부할 당시 '부잣집 아들'이 공학을 배우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석래 명예회장은 무슨일이든 직접 나서서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실무진과 토론도 많이 했고, 임원들도 생각이 다르면 조 명예회장에서 그건 틀린 것 같다며 건의하기도 했다. 조 명예회장은 아무리 부하직원이라도 전문지식과 확신을 갖고 이야기하면 받아들였다. 반대로 잘못이나 약점을 감추려는 사람은 질타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만큼 솔직하고 소탈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해외 출장을 갈 때도 수행원 없이 늘 혼자 다닐 정도로 허례허식을 싫어했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의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정철 전 효성물산 전무의 말에 따르면 홍콩 주재원 당시 경비실에서 '미스터 조'라는 분이 찾아왔다는 연락이 와서 내려가 보니 조 명예회장이 가방을 들고 혼자 서 있었다. 정철 전 효성물산 전무는 “당시 깜짝 놀랐지만 조 명예회장이 정말 소탈한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고 소회했다.

과거 일본에 출장을 갈 때는 자동차를 고집하기 보다 전철을 이용했다고 한다. 멋지게 폼잡는 것보다는 시간약속을 지키기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전철을 이용하는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