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전 국민일보 주필.
이진곤 전 국민일보 주필.

국민의힘이 총선에서 또 참패했다. 21대 총선의 그 참담했던 상황에 버금가는 패배를 되풀이 한 것이다. 그 때는 그래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변명할 수나 있었다. 당 출신의 대통령에 대한 반감으로 절반이 넘는 의원들이 탄핵에 앞장서거나 뒤따른 후폭풍이 당을 덮쳤었다. 당내 탄핵파 가운데 많은 수가 탈당해서 신당을 만들어 나갔다. 집권당의 위상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 분열된 야당으로서 존립자체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었다.

그러나 당의 지도부, 당 소속의원들은 자기 쇄신의 의지를 입증해 보이지 않았다. 대선에서 참패하고 나서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보수 정치인 특유의 안일함과 비겁함을 드러낸 것이다. 때(21대 총선)가 가까워지자 외부에서 명망가를 모셔와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황교안 전 대통령권한대행이 당 대표가 됐지만 리더십 부족으로 당의 혼란과 패배의식을 수습하지 못했다. 

급해지면 남의 명망에 기대는 정당

선거가 임박하자 다시 밖으로 눈을 돌렸다.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 위원장,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맡아 단 1석 차이이긴 했으나 어쨌든 승리를 이끌었던 김종인 씨를 애걸하다시피 해서 중앙선대위원장으로 모셨다. 선거 2주 전이었다.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정당에 승리의 자신감을 불어넣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결과는 참패였다. 그냥 참패가 아니라 궤멸적 참패였다. 황 대표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당의 중진들은 패장이었던 김 전 선대위원장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모셨다. 

이처럼 책임 회피형, 외부 명망가 의존형, 현실 안주형의 인사들이 행세하는 정당이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이었다. 당권 투쟁은 할 줄 알았지만 국민들에게 희망의 길을 제시하고 이끄는 노고는 회피했다. 아이디어도 자신감도 없었다. 이런 정당이 절대다수 의석을 가진 민주당과 겨뤄 대통령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라고 할 만했다. 

적전 분열까지 벌어졌던 당에 승리를 안겨 준 것은 윤석열 당시 후보였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으로서 정권 측의 부당한 ‘조국 감싸기’에 맞서다가 핍박받는 처지에 놓였지만 그게 오히려 국민적 신뢰에 힘입어 일약 정치적 스타가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대선 승리에 당이 기여한 바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당은 집권정당으로서의 지위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수 여당으로서 정권의 안정기반 확보를 위해 당을 혁명적으로 쇄신하고 거대 야당에 과감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맞서서 이겨내는 모습을 보였어야 하지만 그럴 의지가 없었다. 정권을 잡기 무섭게 파벌싸움부터 벌였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향과 방식에 대해 집권당으로서의 참견과 조언이 필요했지만 그건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정부와의 책임 공유를 회피한 셈이다. 

총선이 가까워오자 또 명망가 모셔오기에만 급급했다. 마침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라는 대안이 있었다. 그를 모셔 와서 비상대책위원장직을 맡겼다. 아마 한 위원장은 총선에서 국민의힘 승리를 이끄는 게 윤석열 정권 성공의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여겨 그 직을 수용했을 것이다. 그는 대단히 명민하고 대중적 인기도 있었지만 보수정당, 특히 그 소속 의원들의 정치적 속성을 꿰뚫어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재명‧조국의 후안무치한 정치 행태

한 위원장은 혼자 뛰었고, 결국 패장이 되었다. 21대 총선 때와 마찬가지로 개헌선이 무너질 극한 상황으로 떠밀렸다. 국민은 윤 대통령에게도 실망했겠지만 여당의 무사안일에 등을 돌렸다. 국민의 적극적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정책의 수립과 시행에 실패했다는 뜻이 된다. 특히 여당의 자기쇄신 의지‧책임의식의 부재에 대해서는 심한 불쾌감을 갖게 되었을 법하다. 자기희생의 요구를 기꺼이 감수한 사람은 장제원 의원이 유일했다. 다른 실세들, 중진들, 그리고 다선의원들은 수완을 발휘해서 대부분 공천을 받아냈다. 지켜보는 국민의 기분이 어떠했을 지는 물어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이 같은 인식을 전제로 하고 말한다 해도 민주당의 압도적 승리와 조국혁신당의 대도약에 대해서는 심리적 대혼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선택이니까 존중해야 하지만 그 결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국민의힘의 자멸이라는 점은 알겠는데 야당들의 대승이 자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인정할 마음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범죄 혐의자들로 형사피고인 신분이다. 과거의 정치인식으로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는 자체가 사회 통념과 정치 도의에 어긋나는 몰염치한 행위다. 게다가 이들은 각 당의 대표로 공천을 주도하고 당의 총선을 지휘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지난 대선 이후 나타난 한국 정치의 신풍속도다. 

숱한 범죄혐의로 여러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는 앞으로도 거대 야당을 이끌면서 사사건건 윤석열 정부에 태클을 걸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그간 보여 온 행태로 미루어 거대 의석을 무기로 사법 리스크를 완전 해소하려고 할 개연성도 높다.

조 대표는 공공연히 복수를 위한 정당을 창당했다. 공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인 복수심에 불타서 2심까지 유죄판결을 받은 처지로 당을 만든 것이다. 윤 대통령에 대한 극단적 적개심(탄핵, 정권 조기종식을 신당의 모토로 내거는 등)을 드러내며 유권자를 선동해 비례대표 12석을 확보했다. 이 같은 성공이 그를 복수의 화신으로 만들어, 온갖 방법으로 윤 대통령을 흔들어 댈 게 뻔하다. 

이 대표는 새마을 금고 편법 대출에 더해 재산 신고 축소 의혹으로 중앙선관위에 의해 고발을 당한 양문석 당선인의 공천을 기어이 유지했다. 해괴한 성관련 발언과 글로 국민적 공분을 산 김준혁 당선인에 대해서도 그는 공천을 철회하지 않았다. 비록 낙선은 했지만 아들에게 시세가 30억 원에 이르는 건물을 선물했다고 해서 여론의 질타를 받은 공영운 후보에게도 반성하고 책임질 기회를 주지 않았다. 끝까지 후보직을 유지토록 한 것이다.   

조롱당하는 우리의 대의민주정치

조 대표는 울산시장 선거 개입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은 황운하 의원을 비례후보 8번에 올려 당선시켰다. 일찌감치 불출마선언을 했던 황 의원은 조 대표에 의해 재선의 기회를 얻었다. 박은정 전 검사에게는 비례후보 1번을 부여했다. 남편의 전관예우 의혹으로 논란에 휩싸였으나 조 대표는 그것에 구애되는 빛이 없었다. 

 이들의 정치 행각은 대의민주정치에 대한 조롱이나 다를 바 없다. 공히 법률전문가로서 법에 기대어 정치 도의‧전통‧관행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들에게 국가 발전의 비전 같은 게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 것으로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다고 판단했을 듯하다. 사적 복수심을 사회적 공분으로 재포장해서 유권자들의 정서적 동조를 이끌어내려 했고, 일단은 성공했다.

이들의 인격적 수치(羞恥)‧정치적 도의 및 예의를 내팽개친 의식과 행태가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인격형의 정치인이 정당 대표로, 국회의원으로 정계에서 활개 치도록 유권자들이 허용했을 뿐 아니라 춤마당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윤 대통령과 정부가 불통이고, 국민의힘이 무능하다는 이유로…. 그게 국민의 생각이라면 반박은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앞문으로 들고양이를 쫓아내면 뒷문으로 스컹크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P. H. 비거의 경구(D. 톰슨 편, 근대정치사상, 김종술 역)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기분에 좌우되어 내리는 결정은 종종 엉뚱한 결과를 초래한다. 국민은 정치적 결정에 항상 신중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주권자이기 때문에!

다시 국민의힘에 대해 말하려 한다. 해체→재창당의 수준으로 당의 정신과 가치와 구조를 쇄신해야만 살아남는다. 좌파 세력이 190석에 육박하는 의석을 차지한다고 해도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부와 여당에 대해서는 정치적 행패를 부릴 수가 없다. 국민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면 철저히 변해야 한다. “아내와 자식을 빼고 다 바꾸라”고 한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의 삼성인들에 대한 지시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은 작년 10월 18일 참모회의에서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어떠한 비판에도 변명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 총선의 결과에 대해서도 국민의힘, 그리고 정부는 같은 인식을 가져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거부하거나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게 싫으면 정권을 내놓는 길 밖에 없다. 비상한 각오를 가질 것을 정부‧여당에 주문하고자 한다. 한 사람의 국민 자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