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45년 9월부터 12월에 걸쳐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시작으로 전쟁 지도자들이 하나 둘씩 체포되었다. 1946년 1월 19일에 극동국제군사  재판소(일명 도쿄재판소)가 설치되었다.

2월 18일 도쿄재판소는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맥아더에 의하여 W.F.웹 재판장(오스트레일리아)을 비롯한 10명의 재판관(미국 히긴스·영국 패트릭· 프랑스 베르나르· 캐나다 맥두걸 · 소련 자라아노프 ·중국 메이루아오 · 인도 펄 ·네덜란드 뢸링 ·필리핀 하라니야 ·뉴질랜드 노스크로프트)과 J.B.키난(미국)을 수석검찰관(首席檢察官)으로 하는 30여 명의 검찰관이 임명됨으로써 발족되었다. (나중에 미국의 재판관 히긴스는 크라메르로 교체되었다.) 

4월 29일에 도조 히데키 이하 28명이 A급 전범자로 정식 기소되어, 5월 3일부터 도쿄의 일본 육군 본부 강당에서 도쿄재판이 열렸다. 

도쿄재판은 뉘른베르크 재판과 마찬가지로 영국과 미국의 법체계에 따라 기소절차를 처리했으며 모든 안건은 다수결로 정했다. 
 
1948년 11월12일까지 2년반 동안 열린 도쿄재판은  818차례 공판이 열렸고, 재판 기록은 4만8000페이지에 달했다. 법정에 출두한 증인은 419명이었고, 서면 증인은 779명이었으며, 증거는 4,300여개였다. 최종판결문은 무려 1,213 페이지에 달했다. 

중국 판사 메이루아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법정이 전범들에게   너무 관대했으며, 증인 명단도 신중히 살피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재판관 수에 비하여 전범과 증인이 너무 많은 탓에 정확한 판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메이루아오에 따르면 국제 검찰은 거의 미국의 조종을 받아 움직였기 때문에 죄가 있는 전범을 풀어주려고 하기까지 했다고 회고했다. 메이루아오는 자신이 매우 노력하여 중국인의 피를 흘리게 한 일본의 전범들을 교수형에 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궈팡 편저·송은진 옮김, 역사가 기억하는 1,2차 세계대전, 도서출판 꾸벅, 2013, p 264- 266)

그런데 11명의 재판관 중에서 인도 판사 펄은 ‘일본무죄론’을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인도 펄 판사 현창비. 사진=김세곤 제공
인도 펄 판사 현창비. 사진=김세곤 제공

1948년 11월 12일에  도쿄 재판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다. 

도조 히데키(육군 대장, 제40대 내각총리대신), 이타가키 세이시로 (관동군 참모장), 도이하라 겐지 (제12방면군 사령관), 기무라 헤이타로(버마 방면군 사령관), 무토 아키라(제14방면군 총참모장), 마쓰이 이와네(중지나 방면군 사령관), 히로타 고키(제32대 내각총리대신, 태평양전쟁 당시 침략전쟁 정책 입안자)은 교수형에 처한다. 

펄 판사 현창비. 사진=김세곤 제공
펄 판사 현창비. 사진=김세곤 제공

아라키 사다오, 기도 코이치, 히라누마 키이치로 등 16명은 종신형에 처한다. 도고 시게노루는 징역 20년, 시게미토 마모루는 징역 7년을 선고한다. 

이밖에 마쓰오카 요스케와 나가노 오사미는 재판 도중에 사망했으며,  정신착란을 일으킨 오카와 슈메이는 석방되었다. 나중에 오카와 슈메이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군사법정에서 미친 척했다고 고백했다. 
오카와는 형벌을 피하기 위해 법정에서 갑자기 도조 히데키의 머리를 친다든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등의 행동을 했다. 그러자 그는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판결을 피할 수 있었다. 
1948년 12월 23일 깊은 밤에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7명의 A급 전범은 도쿄 근처 스가모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한편 기시 노부스케(2022년 7월 8일 참의원 선거 유세 중 야마가미 데쓰야의 총격을 받아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할아버지) 제2차 A급 전범 용의자들은 석방되었다.  이 석방은 미소 냉전과 관련되어 있었다. 전쟁 책임 보다도 냉전에 도움을 될 반공주의를 평가하는 것이 미국 정부의 의도였다. 이런 점에서 기시 노부스케등은 냉전체제의 수혜자였다. (아메이야 쇼이치 지음·유지아 옮김, 점령과 개혁, 어문학사, 2012, p 179-180)

이후 일본은 1978년 도조 히데키와 다른 A급 전범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면서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큰 반발을 샀고, 야스쿠니 신사가 군국주의 부활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일본 ‘아사히신문’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 15명이 변호인단 앞으로 제출한 자필 의견서 복사본을 국립공문서관에서 입수해 2009년 1월 24일에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이들은 의견서에 '태평양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자위(自衛)를 위한 전쟁이었다.'며 대부분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