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 직전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연합뉴스 자료사진]
별세 직전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연합뉴스 자료사진]

냉전시대 미국 외교를 이끌면서 동서 화해를 이끌어낸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미국 외교계의 거목으로 평가받는다.

1973년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등 지도부와 대담하는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게티이미지]
1973년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등 지도부와 대담하는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게티이미지]

유대인 출신인 그는 1923년 독일에서 태어나 15세가 되던 해인 1938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1954년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리처드 닉슨과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발탁됐다. 1969년 국가안보보좌관에 오른 데 이어 1973년 제56대 국무장관에 임명됐다.

최현대사에서 그의 발자취는 한 마디로 '레전드'급이다. 

한창일 때의 헨리 키신저[위키미디어커먼스 제공]
한창일 때의 헨리 키신저[위키미디어커먼스 제공]

국무장관을 지낸 데 이어 이후에도 수차례 정부 외교 고문, 특사 등을 맡은 그는 국제관계에 대해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 극적인 타결을 도출한 인물이다.   

특히 지난 1971년 미 최고위급 인사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극비 방문해 '핑퐁외교'로 미중 관계개선의 물꼬를 마련했다. 두 차례의 방중에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통해 이듬해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간 정상회담 성사를 이끌었다.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을 만나는 헨리 키신저[위키미디어커먼스 제공]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을 만나는 헨리 키신저[위키미디어커먼스 제공]

미국과 중국이 20여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 개선에 나선 역사적 순간으로, 결국 미국과 중국은 1979년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또 1973년에는 프랑스 철군 이후 20년 간 이어진 베트남전쟁 종식을 위한 파리평화협상을 통해 미군의 철군을 마무리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973년 베트남전 종식을 공식화한 파리평화협상을 마치고 레득토 베트남 정치국원과 나란히 협상장을 나오는 핸리 키신저 당시 미 국무장관[AP 캡처]
1973년 베트남전 종식을 공식화한 파리평화협상을 마치고 레득토 베트남 정치국원과 나란히 협상장을 나오는 핸리 키신저 당시 미 국무장관[AP 캡처]

키신저는 또 구 소련과의 데탕트(긴장완화)를 조성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소련과의 데탕트 전략으로 1969년부터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주도했으며, 1972년 협정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1974년 소련 방문을 통한 미소 정상회담도 성사시켰다.

1974년 소련 전략도시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해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왼쪽)과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가운뎨)와의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오른쪽)[WSJ 캡처]
1974년 소련 전략도시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해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왼쪽)과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가운뎨)와의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오른쪽)[WSJ 캡처]

1977년 지미 카터 행정부의 출범으로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그는 왕성한 활동을 했다. 저술 및 연구, 강연 등으로 분주했다.

특히 서방 지식인들의 필독서인  '중국론'(On China, 2011년 발간)을 지은 저자로 중국의 의중을 꿰뚫어보는 인사로 평가된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의 명저 '중국론'[아마존 제공. 위키키미디어커먼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의 명저 '중국론'[아마존 제공. 위키키미디어커먼스]

실제로 그는 지난해 5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의 회견에서 미중관계가 마주보고 달리는 '폭주기관차'처럼 위험한 갈등으로 치닫고 있어 3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또 이를 피하고 공존을 위해서는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키신저는 이 인터뷰에서 "양쪽 모두 상대가 전략적 위험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강대국 간 대치로 향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2022년 9월 뉴욕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는 헨리 키신저[신화=연합뉴스 자료 사진]
2022년 9월 뉴욕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는 헨리 키신저[신화=연합뉴스 자료 사진]

그는 "우리는 고전적인 1차 대전 직전의 상황에 있다"며 "모든 쪽에 정치적 양보를 할 여지가 크지 않고 평형을 깨뜨리는 어떤 일이라도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중 관계에 인류의 역사가 달렸다고 보며, 특히 인공지능(AI)의 급진전으로 그 길을 찾는 데 5∼10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키신저 전 장관이 제시하는 해법은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공존이다.

1974년 이집트를 방문해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회담한 후 기자들을 만나는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오른쪽)[AP 캡처]
1974년 이집트를 방문해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회담한 후 기자들을 만나는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오른쪽)[AP 캡처]

그는 "중국과 미국에 전면전의 위협이 없는 공존이 가능한가? 나는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라고 낙관론을 폈다.

키신저는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실패를 견딜 수 있을 만큼 군사적으로 강해져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가장 시급한 현안인 대만 문제에 대해서도 닉슨 대통령이 지난 1972년 처음 중국을 방문해 마오 주석을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1973년 백악관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가운데) 및 제럴드 포드 대통령 지명자(오른쪽)과 현안을 논의하는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왼쪽)[AP 캡처]
1973년 백악관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가운데) 및 제럴드 포드 대통령 지명자(오른쪽)과 현안을 논의하는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왼쪽)[AP 캡처]

마오 주석은 "그들은 반혁명 분자고 우린 지금 그들이 필요없다"며 "100년은 기다릴 수 있다. 언젠가 우리가 그들을 찾을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먼일"이라고 말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실무적인 관계와 신뢰를 점진적으로 쌓아야 한다고도 조언했다. 미 대통령이 중국 국가주석에게 불만 사항을 나열하지 말고 "지금 평화의 최대 위험 요인이 우리 둘"이라고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중 양국이 대만에 관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유지하되, 미국은 병력 배치에 신중을 기하고 대만 독립을 지원한다는 의심을 사지 않아야 한다고도 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4일 대만해협 동부 포사격 훈련 모습[동부전구 웨이보 계정 캡처]
중국 인민해방군의 4일 대만해협 동부 포사격 훈련 모습[동부전구 웨이보 계정 캡처]

키신저는 또 우크라전 자체에 대해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재앙 같은 실수라고 규명하면서도 서방에도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전쟁의 향방에 대해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가능한 한 많이 포기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푸틴이 최소한 크림반도 최대 도시이자 러시아 흑해 함대가 주둔하는 세바스토폴은 지키려 할 것으로 내다봤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일 중국 베이징에서 회담하며 악수하고 있다. 두 정상은 이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제3회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 국제협력 정상포럼' 개막식을 마친 뒤 별도 회담을 가졌다[AFP=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일 중국 베이징에서 회담하며 악수하고 있다. 두 정상은 이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제3회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 국제협력 정상포럼' 개막식을 마친 뒤 별도 회담을 가졌다[AFP=연합뉴스]

그는 "유럽이 '위험성이 있으니까 그들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는 안 왔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무기를 주자'고 하고 있는데 정말 위험하다"며 "우크라이나는 가장 전략적 경험이 부족한 지도부를 가진, 세계 최고로 무장한 나라가 돼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러시아군을 향해 발사되는 우크라이나군의 155mm 곡사포[WSJ 캡처]
러시아군을 향해 발사되는 우크라이나군의 155mm 곡사포[WSJ 캡처]

미국 외교에 대해서도 실용주의를 강조하며 인도를 예로 들었다.

그가 만난 한 인도 고위 당국자는 거대한 다자간 구조에 매이기보다 현안별로 맞춘 비영구적 동맹에 외교 정책의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은 외국에 개입할 때마다 세계를 자유·민주·자본주의 사회로 만들려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도덕적 원칙이 이익에 너무 자주 앞서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그는 지적했다.

2019년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만난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 모디 인도 총리 및 시진핑 중국 주석[게티이미지 캡처]
2019년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만난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 모디 인도 총리 및 시진핑 중국 주석[게티이미지 캡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나 외교정책을 조언하고 2018년에 이어 올해 7월에도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다.

키신저는 한반도 평화에도 관심을 보였다. 

국무장관 시절인 1970년대 중반 유엔에서 중국과 소련이 한국을 승인하고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하는 이른바 '교차승인' 구상과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제안한 일이 대표적이다.

1975년 9월 유엔 총회에서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은 "북한 및 북한의 동맹국이 대한국 관계개선 조치를 취하면, 한국과 미국도 그것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1974년 11월 한미정상회담에 배석한 키신저(맨 오른쪽)[연합뉴스 자료 사진]
1974년 11월 한미정상회담에 배석한 키신저(맨 오른쪽)[연합뉴스 자료 사진]

키신저 본인이 주도적으로 기획한 미·중, 미·소 데탕트의 흐름 속에, 이른바 '강대국 정치'를 통해 한반도 냉전구조를 뒤흔든다는 과감한 구상이었다고 연합뉴스가 평가했다.

모든 외교의 중심에 미중, 미소 등 강대국간의 관계를 올려 놓았던 고인은 이른바 한반도 주변 4강인 미·소·중·일을 움직여 한반도의 냉전 구도를 깨고 긴장을 완화하려는 제안을 던진 셈이었다.

결국 1991년 탈냉전의 흐름을 타고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성사됐지만 '4강'의 남북한 교차 승인은 아직 북미, 북일 수교가 이뤄지지 못함으로써 미완에 그쳤다. 또 한국을 자주 찾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헤 전 대통령과 만났다.

1997년 6월 뉴욕서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 악수하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연합뉴스 자료 사진]
1997년 6월 뉴욕서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 악수하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연합뉴스 자료 사진]

키신저는 100세가 된 올해도 집필 작업을 이어가는 등 끊임없는 열정을 과시했다.

그의 아들 데이비드 키신저는 올해 봄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에서 아버지의 장수 비결로 "꺼지지 않는 호기심으로 세상과 역동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꼽았다.

<원문 참고: https://www.wsj.com/world/henry-kissinger-american-diplomat-dead-11829457

https://edition.cnn.com/2023/11/29/politics/henry-kissinger-dead/index.html

https://www.reuters.com/world/us/key-facts-about-henry-kissinger-us-diplomat-presidential-adviser-2023-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