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3월 6일 오후 2시경, 호류지 서쪽의 삼경당과 서실을 지나서 계단을 올라가니 불당이 하나 나온다. 불당 왼편엔 약사(藥師), 오른편엔 서원당(西円堂)이라고 써진 현판이 있다. 

서원당 올라가는 계단. 사진=김세곤 제공
서원당 올라가는 계단. 사진=김세곤 제공
서원당 앞. 사진=김세곤 제공
서원당 앞. 사진=김세곤 제공

불당 왼편에는 일본어와 영어로 된 '서원당· 약사여래상' 안내판이 있다. 이를 자세히 읽었다. 

안내판. 사진=김세곤 제공
안내판. 사진=김세곤 제공

먼저 서원당이다. 

“서원당 (가마쿠라(鎌倉)시대(1192-1333) 국보) 

서원당은 광명왕후의 어머니인 나치바나 부인의 발원에 의해 교키(행기行基) 보살(668~749)이 718년에 지었다. 현재의 불당은 1270년에 다시 지어졌다. 서원당 중앙에는 일본 최대의 건칠불상(乾漆佛像)으로 약사  여래상이 안치되어 있다. 약사여래상 주변엔 12신장(神將)이 두르고 있고, 동면엔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 온몸이 황금색이며, 두 눈과 두 손 아래 좌우로 각각 스무 개의 손이 있고, 그 손은 각각 하나씩의 눈을 쥔 40수(手) 40안(眼)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보살의 자비와 구원 범위가 무궁무진함을 상징하는 것이고, 특히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모든 소원을 성취시킨다고 한다. - 세계미술용어사전), 북면에는 부동명왕상(不動明王像 힌두교 시바신(Siva神)의 이명(異名)이 불교에 채택된 것인데, 번뇌(煩惱)의 악마를 응징하고 밀교의 행자(行者)를 수호하는 왕으로 간주되었다. 오른손에 검을 쥐고 왼손에는 삭(索)을 쥐었으며, 부릅뜬 눈과 뾰족한 어금니에 윗입술을 깨문 무서운 형상을 한 분노신(忿怒身)으로서 맹염(猛炎)이 있는 것은 악마를 박멸하는 위력을 나타낸다.- 위키백과)이 배치되어 있다. 서원당에서는 매년 2월1일부터 3일까지 3일간 수이회(修二會 藥師悔過)가 엄수된다. 1261년부터 계속된  이 행사는 평화와 풍성한 추수와 호류지의 번영을 기원하는 행사이다. 3일간의 법요(法要)후에는 악귀 추방식이 행해진다. 3명의 악귀를 절에서 추방하기 위하여 비사문천(毘沙門天 사천왕의 한 사람으로서 암흑계를 다스리는 악령의 수장)이 악귀를 추격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단어는 ‘서원당을 지은 행기보살’이다. 행기는 킨테츠 나라 전철역 광장에 동상이 있는 백제계 승려이다. 그는 도다이사[東大寺] 대불전에 높이 15m에 이르는 대형 비로자나불을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일본 역사상 최초로 대승정(大僧正 승려 최고직책)에 올랐으며 민중들에게는 '행기보살'이라 불리며 부처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킨테츠 나라 전철역광장의 행기 승려상. 사진=김세곤 제공
킨테츠 나라 전철역광장의 행기 승려상. 사진=김세곤 제공

행기는 일본 화천국(和泉國) 출신으로 백제 왕인 박사(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학자)의 후손이다. 행기의 아버지는 고시 사이치(高志才智)인데, 왕인의 자손인 가와치노아야시(西文氏)의 일족이었다. 행기는 683년 15세 때 출가하여 호고우사(法興寺)에 살면서 불교의 기초를 닦았고, 나라[奈良] 야쿠시사[藥師寺]에서 신라승 혜기로부터 《유가유식론》을 배웠으며, 18세에는 아스카사 남쪽 선원에서 백제승 도소로부터 선을 배웠다. 24세 때 고우칸사(高官寺) 신라승 덕광법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704년에 집으로 돌아와 옛집을 절로 고치고,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므로 재가사(在家寺)의 시조가 되기도 하였다. 민중과 더불어 관법과 정업을 닦았으므로 추종한 자가 항상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후 민중을 위하여 제자들과 전국을 순행하면서 교량건설, 제방공사, 도로보수, 전답개간, 항구건설 등 민중을 위한 복리사업을 도모하였고, 수용소를 지어서 부랑인들을 구제하고,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농촌 개량사업을 하였다.

신선술과 의술 등을 배웠고 29세 때부터는 일본 각 지역에 불교를 포교하면서 지도를 만들기 시작하여, 뒤에 일본 최초의 전국 지도인 교기즈[行基圖]를 완성하였다. 

733년에는 곤요우사(昆陽寺)를 창건하여 스스로 조각한 약사여래와 11면관음상을 안치하였다. 또한 온천을 개발하였고, 시약원(施藥院)을 두어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을 간호하였다. 745년에는 일본 승단의 최고직인 대승정(大僧正)으로 추존되었는데, 당시 행기를 따르는 승도가 3,000명이었다. 말년에는 나라 도다이사[東大寺] 대불전에 대형 비로자나불을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749년 스가와라사[菅原寺]에서 82세의 나이로 열반했다. 그는 중생 구원을 행한 백제계 승려로서 활약이 지대했으므로 일본에서는 ‘살아 있는 보살’로 찬양 공경하였다.
(두산백과, 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