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기밀 유출 용의자 잭 테세이라[AFP=연합뉴스 자료 사진]
군사 기밀 유출 용의자 잭 테세이라[AFP=연합뉴스 자료 사진]

"어이가 없네."

배우 유아인이 영화 <베테랑>에서 한 이 대사는 최근 국제사회를 뒤 흔드는 미국의 국가기밀 유출사건에 딱맞는 말이다. 

2년째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상황과 미국 등 서방의 군사 지원 현황 그리고 특히 한국, 영국, 이스라엘 등 동맹에 대한 실시간 도ㆍ감청 사실까지 버젓이 일주일 넘게 소셜미디어(SNS)상에 유포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방부, 중앙정보국(CIA) 등 미 관련 기관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이 사건의 용의자는 잭 테세이라는 매사추세츠주(州) 공군 방위군 소속 정보 담당 사병(일병)으로 드러났다. 

◇'졸병'도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1급 비밀 

이번 사건으로 국가기밀에 관한한 '철통같은' 보안을 중시하는 미국으로서는 충격을 넘어 허탈한 분노까지 감지된다. 

미 기밀문건 유출 사건이 발생한 채팅 플랫폼 디스코드의 '로고'[로이터=연합뉴스 자료 사진]
미 기밀문건 유출 사건이 발생한 채팅 플랫폼 디스코드의 '로고'[로이터=연합뉴스 자료 사진]

이에 따라 CIA, 국방정보국(DIA), 국가안보국(NSA) 등 정보공유체(intelligence communuty)의 허술한 기밀 취급 체계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른 셈이다.

정보 분류등급상 최상위인 1급 비밀(top secret)은 통상 국가전략 차원의 정보로서 극도의 보안이 요구된다. 

당연히 1급 비밀을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수밖에 없다. 이는 유출 시 국가의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속성상 1급 비밀 취급권한을 가진 인사는 국방부는 물론이고 CIA, DIA, NSA 등 전 세계에 촉수처럼 분포된 정보기관이 수집해 제공하는 일일 브리핑(daily briefings)과 각종 분석 보고서를 통해 광범위한 정보를 확보한다. 

미국의 정보공유체[위키미디어커먼스 제공]
미국의 정보공유체[위키미디어커먼스 제공]

이런 정보는 언론 보도 같은 공개출처정보(OSINT, 오신트)는 물론이고 인간정보(HUMINT, 휴민트), 신호정보(SIGNIT, 시긴트), 기술정보(TECHINT, 테킨트), 지형공간정보(GEOINT, 지오인터), 계측기호정보(MASINT, 마신트)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입수된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가장 큰 문제는 1급 비밀 취급권한을 가진 사람 수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전문가들을 인용, 미군의 경우 600명이 넘는 장성뿐만 아니라  부관, 국방부 대령급 장교, 해군 함장, 하급 장교 일부는 물론 이번 사건에서 드러났듯 정보부대 소속 일부 사병들조차 같은 수준의 권한을 보유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

연방수사국(FBI)은 국방부 기밀 문건을 유출한 혐의로 주방위군 소속 잭 테세이라를 노스다이튼 자택에서 체포했다[AP=연합뉴스]
연방수사국(FBI)은 국방부 기밀 문건을 유출한 혐의로 주방위군 소속 잭 테세이라를 노스다이튼 자택에서 체포했다[AP=연합뉴스]

그러나 실제로는 1급 비밀 취급권한을 가진 사람 수는 적게는 수천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게 미 국방부 당국자를 포함한 전문가들이다.

정작 더 큰 문제는 보통 '2급 비밀'(secret) 취급권한 보유자다. 미 국방부, CIA, NSA, FBI 등 미 정보공유체(intelligence community) 소속 16개 국가안보 관련 기관 근무자라면 사실상 거의 모두가 어렵잖게 2급 비밀을 열람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꼬집었다.

미 중앙정보국(CIA) 로고[EPA=연합뉴스]
미 중앙정보국(CIA) 로고[EPA=연합뉴스]

NYT는 이어 미국에서는 민간군사업체와 싱크탱크 애널리스트들조차 일정 수준의 비밀 취급권을 지닌다고 지적했다.

또 "이번 사건이 '1급 비밀'이란 것이 실제로 기밀이었는지, 국가안보기구들이 민감한 자료가 널리 퍼지도록 방치해왔던 것이 아닌지에 대해 폭넓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평했다.

◇ 미 국방부, '첼시 매닝 신드롬'에 여전히 시달려

이번 사건을 접한 미 국방부는 첼시 매닝 일병 사건의 재현됐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군사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체포된 첼시 매닝 일병[CBS. 위키미디어커먼스 제공]
미국의 군사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체포된 첼시 매닝 일병[CBS. 위키미디어커먼스 제공]

이 사건은 지난 2010년 5월 이라크 주둔 미 육군 정보 분석병 첼시 매닝 일병이 국방부 내부 전산망에 접속해 기밀문서를 유출한 후 위크리크스에 제공해 미군의 '치부'를 전 세계에 폭로하고, 위신을 추락시킨 혐의로 쇠고랑을 찬 것을 일컫는다.

매닝 일병이 폭로한 기밀 가운데에는 지난 2007년 미군의 아파치 무장헬기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영상,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미군 군사작전 일지, 미 국무부 전문 등이 포함됐다.

매닝은 군사법원에서 간첩죄 위반과 절도 등 모두 20개 혐의가 인정돼 징역 3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다 그는 지난 2017년 방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7년형으로 감형돼 석방됐다.

첼시 매닝 일병이 유출한 이라크에서의 미군 헬기 민간인 공격 동영상[위키미디어커먼스 제공]
첼시 매닝 일병이 유출한 이라크에서의 미군 헬기 민간인 공격 동영상[위키미디어커먼스 제공]

전문가들은 테세이 일병이 저지른 이번 행위가 매닝 일병 사건처럼 비밀취급권한을 가진 사람이 사실상 아무런 제약없이 기밀에 접근해 유출시킬 수 있는 보안상 취약점(vulnerabilities)을 갖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어 매닝 일병 사건 이후 오바마 정권이 기밀과 관련된 전산망을 보호하기 위해 "정교한 경계 수단"(sophisticated and vigilant means) 마련 필요성을 강조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또 정보기관에 "기밀망의 책임 있는 공유와 보호를 보장할 수 있는 구조적 개혁"(structural reforms to ensure responsible sharing and safeguarding of classified networks)을 지시했다고 지적했다.

미국 국방부 청사[로이터=연합뉴스 자료 사진]
미국 국방부 청사[로이터=연합뉴스 자료 사진]

이후 관련 기관에서는 USB 플래시 드라이브 같은 휴대용 저장기기를 허가없이 사용하는 것을 단속하거나 인가권이 없는 디바이스가 정부 전산망에 삽입되면 보안요원들에게 즉각 통보되는 등의 방식을 채택해 사용 중이다.

또 소위 '사용자 행동 감시'(User Activity Monitoring) 방식을 통해 기밀 데이터베이스 등 기밀체계에 습관적으로 접근하거나 이를 다운로드하는 사람들을 추적할 수 있게 됐다.

미국 델라웨어주 공군기지에서 미군 병사가 우크라이나에 보낼 155㎜ 포탄을 옮기는 모습[AP=연합뉴스 자료 사진]
미국 델라웨어주 공군기지에서 미군 병사가 우크라이나에 보낼 155㎜ 포탄을 옮기는 모습[AP=연합뉴스 자료 사진]

전문가들은 그러나 이런 시스템에도 취약점은 상존한다면서, 정보기관 등 국가안보 관련부서에 근무자들에 대한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수시로 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비밀 전파 방식을 개선해 필요한 사람만 접근, 확보,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NSA 감사관을 지낸 글렐 저스텔은 미 정부가 비밀 유포 체계 개선작업에 더욱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