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수장[연합뉴스 자료 사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수장[연합뉴스 자료 사진]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러시아판 '스파르타쿠스' 무장반란이 하루 만에 막을 내렸다.

불과 하루 만에 수도 모스크바에서 200km 떨어진 곳까지 진격,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권력을 위협했던 용병기업 바그너 그룹의 이번 반란은 참가 병력이 진격을 멈추면서 표면적으로 끝났다. 

'푸틴의 요리사'로 불릴 정도로 푸틴의 신뢰와 총애를 구가하다 권력에서 멀어지자 이번 반란을 주도한 바그너 그룹 수장 프리고진은 부하들에 대한 죄를 묻지 않는 조건으로 반란을 끝냈다.

사실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프리고진은 벨라루스로의 망명 조건이 받아들여지자 승산없는 이 반란을 끝낸 것으로 알려졌다.  

로스토프서 철수하는 바그너 그룹[로이터=연합뉴스 자료 사진]
로스토프서 철수하는 바그너 그룹[로이터=연합뉴스 자료 사진]

이 바람에 우려했던 대규모 유혈충돌은 피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후유증이 만만찮을 것이라는 데는 의견을 같이한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최대 피해자는 푸틴이라고 지적한다.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23년 정치 리더십에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됐다는 풀이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찍힌 격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푸틴 스스로가 "등에 칼을 찔렸다"고 표현한 것처럼 심복인 프리고진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여기에다 상황 수습을 자신이 아닌 '꼭두각시'인 알렉산드르 루카센코 벨라루스에 맡긴 것도 체면을 구겼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21일(현지시간) 사관학교 졸업생을 상대로 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다[타스=연합뉴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21일(현지시간) 사관학교 졸업생을 상대로 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다[타스=연합뉴스]

'작은 스탈린'(Little Stalin)이라는 별명처럼 철권통치를 행사해오던 푸틴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자칫 권력 상실 위기에 직면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개전 16개월째인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스페츠나츠(특수부대) 출신들을 근간으로 하는 바그너 그룹 용병들은 최격전지에 배치돼 정찰에서부터 돌격과 방어까지 다양한 임무에 투입됐다. 

'총알받이'라는 모멸을 감수하면서도 바그너 그룹은 오합지졸인 러시아 정규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나름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했다.

리만에서 퇴각하다 목숨을 잃은 러시아군 병사들의 시체가 늘려 있다[WSJ 캡처]
리만에서 퇴각하다 목숨을 잃은 러시아군 병사들의 시체가 늘려 있다[WSJ 캡처]

그러나 현장 상황을 모르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상부의 지시와 형편없는 보급 문제에 시달린 부하들의 불만에 프리고진은 푸틴의 총애를 무기로 군 수뇌부를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런 불만 표출에도 정작 푸틴은 몇달 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외신과 전문가들은 푸틴의 이런 태도가 빠르게 힘을 키워나가는 군 수뇌부를 견제하기 위한 일종의 '큰 그림'이 아닐까하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반란이 발생하자 푸틴은 TV연설을 통해 "반역"으로 규정하면서 강력 대응 의사를 밝히면서 이런 분석은 무색해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용병기업 바그너 그룹의 무장반란에 대해 "우리는 등에 칼이 꽂히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반역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외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TV 연설에서 이처럼 밝히고 "우리의 대응은 가혹할 것이다. 반역 가담자는 처벌될 것"이라고 경고했다[스푸트니크.AF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용병기업 바그너 그룹의 무장반란에 대해 "우리는 등에 칼이 꽂히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반역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외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TV 연설에서 이처럼 밝히고 "우리의 대응은 가혹할 것이다. 반역 가담자는 처벌될 것"이라고 경고했다[스푸트니크.AFP=연합뉴스]​

푸틴은 권좌 유지에는 잠재적 정적들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엘리트층 간 갈등과 반목을 용인하고 심지어 조장까지 하면서 최종권력을 자신이 갖고 있다는 점을 부각해왔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푸틴의 통치 방식이 더는 통하지 않게 됐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CNN 방송은 "푸틴이 그동안 유지해 온 독재 체제의 궁극적 장점인 완전한 통제력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다.

'푸틴의 요리사'로 알려진 예브게니 프리고진 와그너그룹 설립자(왼쪽)[로이터 캡처]
'푸틴의 요리사'로 알려진 예브게니 프리고진 와그너그룹 설립자(왼쪽)[로이터 캡처]

그러면서 "러시아 엘리트들은 대통령의 흔들리는 정권과 그 정권이 더러운 일을 하기 위해 만든 용병 '프랑켄슈타인' 사이에서 실존적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다.

외신의 '단골손님'인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은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프리고진이 푸틴에 굴욕감을 안겨주면서 더는 폭력에 대한 독점이 없음을 보여줬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푸틴이 프리고진을 과소평가한 것이 이번 사태의 또 다른 화근이었다고 주장한다. 

루카센코 벨라루스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스푸트니크=연합뉴스 자료 사진]
루카센코 벨라루스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스푸트니크=연합뉴스 자료 사진]

뉴욕타임스(NYT)는 타티아나 스타노바야 카네기 러시아 유라시아센터 선임 연구원을 인용, "푸틴은 프리고진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충성스러울 것이라고 그의 위협을 과소평가하는 실책을 저질렀다"고 꼬집었다.

러시아 정보 전문가이자 유럽정책분석센터의 선임 연구원 안드레이 솔다토프도 "푸틴의 계획은 프리고진이 계속 입을 열게 하는 것이었지만 계산을 잘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서방이 러시아를 상대로 한 진짜 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했다[스푸트니크·AF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서방이 러시아를 상대로 한 진짜 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했다[스푸트니크·AFP=연합뉴스]

외신도 이번 사태가 진압됐다 하더라도 그 여파가 당분간 지속돼 정치적 불안정을 조장하고 푸틴의 리더십에 의문이 제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비판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푸틴은 프리고진이 '공적 1호'로 지목한 쇼이구 국방장관을 사태 대처 실패 등을 이유로 물갈이할 가능성도 제기됐다.

사태의 발단을 제공하고, 바그너 그룹 병력이 거침없이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하게 한 책임을 쇼이구 장관에게 전가하면서 일시나마 비난의 화살을 피해가자는 속셈이라는 풀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총지휘관인 그를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승리는커녕 엄청난 손실과 특히 대국 러시아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뒤흔든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시한 데 대한 비판도 무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영국 가디언의 보도는 주목할만하다. 가디언은 지난 1991년 여름 국가보안위원회(KGB) 강경파의 쿠데타 시도가 몇 달 뒤 소련의 붕괴를 앞당겼다는 점을 거론하며 "역사가 반복된다고 말하기엔 너무 이르지만,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로 한 푸틴의 결정은 가장 큰 전략적 실수이자 조만간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중대한 실수임이 입증됐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동원군인 전송 행사[타스=연합뉴스 자료 사진]
러시아 동원군인 전송 행사[타스=연합뉴스 자료 사진]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러시아는 무너져가는 전선을 지키기 위해 수십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야 했고, 이로 인해 대규모 이민이 발생했다"며 "러시아 내륙 깊숙이 우크라이나 드론 공격이 일상화하면서 푸틴이 공들여 쌓아온 강인한 이미지에 구멍이 뚫렸다"고 전했다.

WSJ은 이어 군사 분야 싱크탱크인 '전략·기술 분석 센터'의 루슬란 푸코프 소장을 인용,  "장기전이 러시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푸틴과 일부 엘리트의 희망은 위험한 착각"이라며 "전쟁의 장기화는 러시아에 엄청난 국내 정치적 위험을 수반한다"고 경고했다.

격전지 바흐무트에서 러시아군을 향해 S60 대공포를 발사하는 우크라이나군[게티이미지 제공]
격전지 바흐무트에서 러시아군을 향해 S60 대공포를 발사하는 우크라이나군[게티이미지 제공]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비록 '날갯짓'에 불과하지만, 유사한 사태가 잇따라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이 경우 푸틴의 권좌 축출은 물론이고 내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